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배운 것
혼자 여행을 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결혼 후 주말부부를 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은 있었지만 여행을 목적으로 나만의 시간을 갖는 건 처음이었다. 아내가 허락해준 시간은 3박 4일이다. 목적지는 제주도. 3일 동안 제주 올레길 3코스를 도는 일정이었다. 7번 길을 시작으로 11번 까지였다. 평소 운동을 안 해 몸에 무리가지 않도록 천천히 걷자 마음먹었다. 8시쯤 제주 공항을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 서귀포까지 가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이다. 첫날부터 날씨가 안 도와줄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올레길 안내 센터를 찾았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코스를 다시 확인했다. 10시 반, 센터를 나왔다. 제주도 날씨는 내 아내와 같았다. 한 치 앞을 짐작할 수 없다. 구름에 가렸던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멀리 눈 덮인 한라산도 볼 수 있었다. 이정표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에 들어오는 경치는 빨리 걸으라고 부 축이는 것 같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저 앞의 근사한 풍광을 놓칠 수도 있어. 정말 그래도 되겠어?'
날씨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말을 듣고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햇살이 만드는 경치는 나를 홀리기 충분했다. 경치에 홀린 결과는 참혹했다.
산에 오를 때보다 하산할 때 더 많이 다친다고 한다. 정상을 오른 기쁨, 올라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익숙함에 긴장이 풀리고 내딛는 발걸음에 속도가 붙으며 발목을 접질리거나 낙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오를 때는 이성적으로, 내려올 땐 충만한 감성이 사고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이성 줄을 놓은 나도 내 속도를 제어하지 못했다. 한 번 붙은 탄력은 숙소에 도착해서야 멈출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씻고 침대에 눕자 반성했다. 이렇게 걷다간 사단이 날 것 같았다. 오전에 올레길 센터에서 완주 인증서를 받는 분을 봤다. 그분은 약 1년 동안 제주도를 오가며 차근차근 코스를 완주했다고 한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한 코스씩 완주하는 식이었다. 누군가는 일정을 정해 전 코스를 한 번에 완주하기도 한다. 둘 다 완주를 목적으로 하지만 걷는 속도는 다르다. 목적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자신만의 속도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1년 동안 완주는 분, 한 번에 전 코스를 완주하는 분, 나처럼 며칠 동안 몇 개의 코스를 걷는 건 속도가 달라야 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걷는 것도 아니다. 나만의 속도,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만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한 둘 째날, 이날도 예상치 못한 변수에 또다시 속도를 잃고 말았다. 이번엔 너무 뻔한 경치가 문제였다. 몇 해 전 친구들과 왔던 중문 단지를 걸었다. 익숙한 경치는 지루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더 빨리 걸었다. 쉼 없이 걷다 보니 몸에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배낭을 멘 어깨는 첫날보다 더 아팠다. 발목은 이미 감각이 없을 마만큼 얼얼했다. 문제는 무릎이었다. 걸음이 더해질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8시 넘어 숙소에 들어갔다. 긴장이 풀리자 무릎 통증이 더 심해졌다. 불안했다. 다음 날 아침, 통증이 더 심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것도 힘들었다. 올레길 코스는 포기하고 버스를 탔다. 버스는 계획에 없었다. 스마트 폰 지도가 없었으면 꼼짝 못 했을 거다. 버스 노선을 기준으로 주변 관광지를 검색하니 가 볼 만한 곳이 많았다. 계획에 없던 마라도를 갔다. 마라도 자장면을 맛보진 못했지만 경치는 눈에 담아왔다. 마라도를 걸어서 한 바퀴 돌았다. 통증이 심해져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 덕분에 파도, 구름과 바람, 햇살이 눈과 귀를 통해 온 몸으로 전해졌다. 느릿하게 걸었고 한 시간 만에 섬을 빠져나왔다.
살면서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다.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경치에 취해, 익숙함이라 돌부리에 걸리며 속도 조절을 못했고 결국, 무릎이 나가는 불상사를 겪었다. 내가 계획한 일정과 속도대로 걸었으면 더 많은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물론 무릎을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테다. 그렇게 못다 한 아쉬움은 배낭 깊이 넣어두고 일상으로 돌아왔고, 당분간 병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했다.
인생을 걷기나 달리기에 비교하는 표현이 있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
'방향이 정했다면 속도를 내야 한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방향만 올바르면 된다.'
'남의 속도를 따라가기보다 내 속도대로 걸으면 된다.'
의미를 들여다보면 다 맞는 말이다. 나는 이 말들에 내 경험을 더해보고 싶다.
"속도, 방향 모두 중요하다. 단, 무릎이 온전해야 걷고 뛰는 것도 가능하다. 내 몸부터 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