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너는 언젠간 시간의 가치를 알게 되겠지
"지금이 12시니까 3시에 나가는 걸로 하자. 아빠는 그 시간 맞춰 들어올게."
"어! 알았어 아빠."
대체 휴일. 하루 더 쉴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다. 6시에 집을 나섰다. 이 시간에 갈 수 있는 곳은 맥도널드뿐이었다. 커피 한 잔과 먹지 않는 맥머핀을 시켜 자리를 잡았다. 일기를 쓴 뒤 노트북을 열었다. 세 번째 초고 주제를 잡기 위해 워드를 켰다. 빈 화면을 한 줄씩 채웠다. 퇴근길 도로 위 정체 구간처럼 생각이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겨우 절반쯤 채우니 8시 반이었다. 자리를 정리했다. 전날 큰딸이 내일 아침으로 빵을 먹고 싶다는 말이 생각났다. 빵과 샐러드를 사 집으로 갔다. 9시쯤 들어가니 이미 아내와 큰딸이 아침밥으로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멋쩍게 봉투를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가 알타리 김치를 담가놨다고 가져가라고 했다. 둘째를 데리고 갔다. 11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큰딸이 넋을 놓고 TV를 보고 있다.
큰딸이 몇 주 전부터 서점을 가자고 했었다. 학교에서 받은 도서 상품권으로 책을 사고 싶다고 했다. 지정된 서점에서 15,000원 한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이었다. 나도 책을 안 산지 오래된 것 같아 함께 가기로 했었다. TV를 보고 있는 큰딸에게 물었다.
"서점 언제 갈 꺼니? 아빠는 지금 갔으면 좋겠는데." TV에 눈을 고정한 체 대답한다.
"어...... 글쎄 아빠는 지금 가려고?"
"어. 아빠는 갔다 와서 또 할 일이 있어서. 지금 갔다 오면 좋지." 내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눈은 TV에 고정되어 있다. 눈치를 보니 지금 나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쳤다.
"아빠가 3시쯤 들어올 테니 그때 나가자. 준비하고 있어."
"알았어 아빠." 여전히 TV에서 눈을 못 떼고 대답만 한다.
약속을 정하고 다시 노트북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아침에 마무리 짓지 못한 초고 주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강의를 들어야 해서 지금 마무리를 해야 했다. 강박을 갖고 하니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 2시 반 노트북을 덮고 카페에서 나왔다.
집에 들어오니 큰딸은 씻고 있었다. 3시에는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느긋하게 기다렸다. 욕실에서 씻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씻는 데 최선을 다하는 큰딸은 3시가 되어서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 말 안 하고 지켜봤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어슬렁어슬렁 거린다. TV도 보다가 태블릿도 보다가 엄마의 잔소리에 그제야 머리를 말리러 들어간다. 드라이기를 앞에 두고 또 딴짓을 하고 있다. 그래도 가만히 두고 봤다. 아내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큰딸에게 한 마디 한다.
"아빠 기다리고 있잖아, 빨리 준비해."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손이 빨라진다. 그래도 아무 말 안 하고 지켜봤다. 머리끝이 덜 말린 체 드라이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들어갔다. 그제야 아내와 나도 신발을 신었다. 약속한 3시 보다 40분이나 늦게 집을 나섰다. 차에 타 한 소리 할까 하다가 참았다. 그리고 생각해 봤다.
그 상황에서 내 입으로 나올 말은 뻔했다.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데 서둘러 주면 안 됐을까?'
'네 시간이 소중하듯 아빠 시간도 소중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약속한 시간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누가 들어도 잔소리 같은 말 뿐이다. 큰딸에게 내뱉고 나면 둘 다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쉬는 날이니 한껏 늑장을 좀 부리면 어떤가. 서둘러 갈 만큼 중요하고, 시간 안에 가야 하는 곳도 아니었다. 집 밖을 나서기 싫어하는 큰딸이 오랜만에 먼저 나가겠다고 하는 거니 기분 좋게 가면 그게 더 서로에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운전하는 내내 참을 '인' 수 십 개를 마음속으로 썼다. 티 내지 않았다. 서점에 도착해 함께 책을 골랐다. 책은 안 읽지만 새 책 냄새는 좋다는 큰딸을 보며 잔소리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괜히 나만 조바심 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 일 아닌 건데.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