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을 하지 않은 대가
최종 임원 면접이 있는 날이다. 1,2차 면접을 통해 나를 포함해 4명이 같은 자리에 있다. 채용 공고에 올라온 모집 직종과 남은 4명이 일치했다. 합격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임원 면접은 형식적인 자리일 수 있었다. 지원자 4명과 대표, 임원 2명이 한 공간에 마주 앉았다. 질문은 주로 대표가 했다. 일상적인 수준의 질문이었다. 한 사람에게 한 두 개의 질문을 던진 뒤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 설립부터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넉을 놓고 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몸속 피가 평소보다 빠르게 도는 것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하고 싶은 말이 혓바닥을 간지럽혔다. 용기를 냈다.
"대표님 이야기를 들으며 제 자신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저는 비겁했습니다. 얼마 전 지인과 사업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저만 몰래 이렇게 면접을 보러 다녔습니다. 저만 살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잘못 생각했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번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면접장을 나서며 넥타이를 풀었다. 어울리지 않는 넥타이를 매고 하고 싶은 일은 외면하고 해야 할 일을 찾고 있었다.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푸니 한결 가벼웠다. 나를 기다리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면접을 보러 오고 간 건 나 혼자 비밀로 덮어주기로 했다.
다시 몇 달을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의욕은 넘쳤지만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대표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숙식이 가능한 오피스텔에서 합숙하며 말 그대로 놀고먹는 날이 이어졌다. 아무도 서로에게 아무 말 안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눈치만 보며 차려주는 밥을 먹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의 자리에서 게임과 뉴스 서핑으로 하루를 보냈다. 탄탄한 중견 기업 채용을 눈앞에 두고 무슨 객기로 이를 걷어차고 나왔는지 나 자신이 한심했다. 후회한 들 되돌릴 수 없다. 다시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시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돈 때문이었다. 1년 넘게 월급을 못 받았다. 숙식 제공으로 월급을 대신했다. 돈이 필요했다. 전공과 상관없이 월급을 많이 받는 일을 찾았다.
'수행기사'
이번에도 미리 알리지 않고 면접을 봤다. 운이 좋았는지 한 번에 합격했다. 정식 출근 날이 정해졌고 인수인계까지 받았다. 전임자와 하루 동안 함께 다니며 동선을 확인하고 필요한 절차를 익혔다. 오후에는 연습 삼아 직접 운전하며 오후 일정을 수행했다. 밤 9시가 넘어서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다음 주 출근을 약속한 뒤 퇴근했다.
10시가 넘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금요일 밤이라 식탁에 둘러앉아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함께 생활하다 버니 그냥 잘 수 없었고 빈자리에 앉았다. 술잔이 돌자 대표는 말이 많아졌다. 앞으로의 계획을 술술 풀어냈다. 계획은 늘 거창했다. 거창한 계획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내 살 길을 찾기 위해 면접을 봤던 거였다.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건성으로 들었다. 어차피 나는 다음 주면 이 자리에 없을 거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을수록 대표의 설득이 시작되었다. 나에겐 익숙했다. 대표는 회사로 인해 불안해할 나를 수시로 설득했다. 지금껏 그 말을 믿고 2년 넘게 함께 하고 있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라 결심했다. 그 자리에서 출근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더 이상은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다.
다음 날 오전, 퀵 서비스를 불렀다. 가지고 있던 차키를 돌려보냈다. 다리를 다쳤다는 어설픈 핑계로 출근하지 못한다고 알렸다. 그렇게 또다시 스스로 기회를 날려 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뒤로 2년을 더 일했다. 일어서나 싶었던 회사는 다시 주저앉았고, 어느 날 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표는 야반도주를 했다. 그게 내 인생 중 4년 반을 투자했던 결말이다.
돌이켜 보면 후회가 된다. 처음 중견 기업에 입사를 했으면 어땠을까? 처음은 내 의지대로 포기했다 치더라도 두 번째 입사를 결심했다면 어땠을까? 월급도 복지도 괜찮은 조건이었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어쭙잖은 설득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 거다. 그런들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말하지 않는 건 나 자신이었다. 할 말을 하지 않은 덕분에 4년 반을 날리긴 했지만 그것도 내 몫일뿐이다. 말하지 않은 대가 치고는 너무 긴 시간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