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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18. 2021

억울해 미치겠다

내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나만 걸렸을 뿐이고, 거기 있었던 사람 모두 다 그렇게 해요.’

쫓겨나는 그날까지 마음속으로 수백 번 되 뇌인 말이다. 변명 한 마디 못하고 회사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는, 아르바이트였다.     

 

같은 시간 일을 해도 시급을 많이 받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뒤라 체력은 자신 있었다. 몸을 쓰는 일이 시급도 많이 받는다는 걸 안다. 동네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는 생활정보지를 매주 쓸어 담아 왔다. 구인광고만 집중적으로 팠다. 눈에 띄는 광고가 있었다. 


‘대형마트 수산코너 판매직 / 8시간 근무 / 시급 2,500원 / 식사 제공’


시급이 눈에 들어왔다. 1천 원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건 일이 힘들 수 있다는 의미다. 체력엔 자신 있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력서를 내고 연락을 기다렸다. 며 칠 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집 앞 정류장에서 좌석버스 한 번만 타면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출퇴근도 나쁘지 않았다. 면접을 보고 다음 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합격하니 입사까지 까다로운 절차가 남아 있었다. 입사가 결정되면 앞서 낸 이력서 외 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하고 등본, 초본, 통장사본까지 내야 했다. 거기에 신체검사까지 받아야 정식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다양한 업종을 경험했다. 그동안 경험한 아르바이트는 조직체계라는 게 없었다. 식당, 달력공장, 레스토랑, 건설현장 등 일을 시키는 사람이 월급까지 주는 그런 식이었다. 제출할 서류도 없었다. 월급은 한 달에 한 번 현금을 봉투에 담아 줬다. 그런 곳에서만 일했던 나에게 대형마트 입사 과정은 낯선 경험의 연속이었다. 


까다로운 절차 덕분에 출근 전부터 주눅 들어 있었다. 주눅이 든 체로 첫 출근하니 행동은 당연히 부자연스럽다. 뭘 해야 할지는 당연히 몰랐다. 눈동자만 굴리고 있으면 이런저런 지시가 내려졌다. 군대에서도 눈치 하나로 버텼다. 시키는 건 빠릿빠릿하게 잘했다. 삼 일정도 지나니 출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 그렇게 감을 잡으니 일도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일이 능숙해지면서 함께 일하는 선배들과도 친해졌다. 수산코너에도 정직원, 계약직, 아르바이트로 나뉘어 있다. 수산코너 제품 입출고를 총괄하는 정직원이 있고, 판매대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계약직이 있고, 나처럼 판매와 잡다한 일을 하는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업무는 구분되어 있지만 매장 안에서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8시간 근무하는 동안은 위아래를 떠나 편안한 형 동생처럼 지냈다. 8시에 출근해서 상품 진열을 하는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매장 문을 여는 10시까지 모든 걸 마쳐야 했다. 10시가 되면 한 숨 돌린다. 그것도 잠시 11시부터 손님이 늘어난다. 8시부터 일을 하려면 6시에는 일어나 출근한다. 12시쯤 되면 배고픔이 최고조에 달한다.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는 오후를 버텨내려면 점심은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 그래서 일과 중 점심 먹는 시간이 가장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이다. 대형마트가 좋은 점은 한 끼 수준이 남다르다. 자율배식은 기본이고 반찬의 종류와 맛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손색이 없다. 자칫 정신 놓고 먹으면 살찌는 건 순식간이다. 그렇게 든든하게 먹고 나면 30분 정도 여유시간이 생긴다. 대형마트는 손님을 위한 다양한 공간은 있지만 그 안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맘 놓고 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 편하게 쉬고 싶은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공간이 있었다.      


그날도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우리만의 아지트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가 쉬는 곳은 설탕, 밀가루 포대가 쌓여 있는 창고였다. 그렇다고 쌓여 있는 제품 위에 앉는 건 아니다. 제품은 벽면에 설치된 수납장에 정리되어 있고 그 앞에 종이를 깔고 두 다리를 펴고 앉는다. 한 마디로 바닥에 신문지 펴고 앉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만 사람들 눈을 피해 조금은 편안한 자세로 있는 차이일 뿐이다. 배도 든든하고 두 다리도 펴고 앉으면 졸음이 오는 건 당연한 순서다. 함께 쉬다 보면 누구는 머리를 기대고 잠시 쪽잠을 잔다. 그렇게 10~20 분자고 나면 몸이 개운해져 일에 활력이 생긴다고 한다. 2주 정도 근무하다 보니 동료들과 제법 가까워졌다. 말주변이 없어 함께 있어도 수다를 떠는 편은 아니다. 대부분 듣거나 맞장구치는 수준이다. 문제의 그날도 둘러앉아 있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양해를 구하고 수납장에 기대 잠이 들었다. 순간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잠시 뒤 누군가 내 다리를 툭툭 치며 깨웠다. 당연히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줄 알았다. 동료들 사이로 모르는 얼굴이 보였다. 내가 일어나자 다른 동료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낯선 얼굴의 남자는 나에게 어느 코너에서 일하는지 물었다. ‘수산코너’라고 답하자 알았다는 표정을 하고는 대꾸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오전, 수산코너를 총괄하는 과장님이 나를 찾았다. 전날 점심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장소와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내 태도가 문제가 되어 오늘부로 퇴사 결정이 났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태도’는 휴게 공간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잤다는 것과 잠 잘 당시 수납된 제품 위로 상체가 반쯤 걸쳐 있던 자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억울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나보다 더 오래 근무했던 이들도 같은 곳에서 쪽잠을 잤다. 바닥에 앉아 다리를 펴고 진열장에 몸을 기댄 자세로 잠을 자는 건 말 그대로 휴식일뿐이었다. 정리된 제품에 손상을 줄 일도 없었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 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과 나의 차이는 자는 모습을 관리감독자에게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차이였다. 못 보고 몰랐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나처럼 한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럴 용기도 없었다. 억울했지만 그들이 잘못했다고 하니 잘못한 거라 믿었다. 매장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설명하니 어이없어했다. 한편으로 내가 재수가 없었다고 위로해줬다. 그렇다고 해고가 번복될 일은 없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옷을 갈아입고 한참 일 할 시간에 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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