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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15. 2021

하!...입이 탄다

말로 못해 글을 씁니다.

“이사님 이번 달 수금은 언제 될까요? 여기저기 업체랑 근로자한테 시달려 죽겠습니다.”

“수금? 말일에 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봐. 지난달에도 안 줬으니까 이번 달에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공사 수주를 담당하는 영업이사의 말이다. 매달 못 받는 공사비가 쌓여가고 있었다. 공사는 해주고 돈은 제때 못 받으니 현장에서 일하고 납품한 업체의 원성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원성을 맨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일은 현장에서 하고 돈은 본사에서 지급한다. 모든 현장의 서류는 본사 관리자인 나를 통해 결재가 올라간다. 현장에 투입된 모든 비용은 매달 정리된다. 정리된 내용은 결재권자를 거쳐 다음 달 중 일괄 지급하는 시스템이다. 중요한 건 돈이 지급되기 전 공사비가 수금되어야 한다. 수금된 돈에 한 해 지급하는 게 회사가 정한 원칙이었다. 거래처와 근로자는 정해진 날짜에 입금되지 않으면 다음날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이어진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거래처나 근로자는 현장 공사 담당자와 일을 한다. 그들의 지시를 받고 일을 하고 비용을 결정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본사 결재를 받기 위해 다리 역할만 할 뿐이다. 현장 담당자는 공사비가 언제 지급될지 신경 쓰지 않는다. 수금일이 명확하지 않으니 본인들도 약속하기 껄끄럽기 때문이다. 그럴 땐 본사로 떠넘기는 게 그들에겐 최선이다. 명분도 그럴듯하다. 어차피 거래처에 지급될 돈은 모두 본사에서 송금해주기 때문이다. 제때 대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대표나 임원이 직접 나서 그들을 상대하지 않는 게 조직이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은 월급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수금이 되든 안 되는 거래처와 근로자는 정해진 날짜에 돈을 받는 게 원칙이다. 그들에게 우리 사정을 백날 이야기해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 우리는 일을 시켰기 때문에 무조건 돈을 줘야 하는 의무만 있을 뿐이다. 날짜를 어겨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면 그들의 어떤 반응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어쩌면 최전방에서 그들이 쏟아내는 말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방패다.     


월 초가 되면 출근하기 싫다. 매달 말일까지 현장별 자금 청구서를 정리해 회계부로 넘긴다. 회계부는 원칙에 따라 수금이 되는 만큼 지급하게 된다. 제때 지급받지 못한 거래처가 전화하기 시작하는 게 이때부터다. 일하는 중간중간 벨소리가 울리면 가슴이 철렁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일단 전화는 무조건 공손하게 받는다. 이미 나는 회사를 대표하는 죄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화기를 들기 전 심호흡을 한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할지 대충 짐작해본다. 그 말에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해둔다. 회사 자금 사정을 감안해 대략적인 날짜도 예상해 놓는다. 이런 대화를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담당자일 뿐 책임자는 아니다. 내 역할은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대화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그렇게 마음먹고 전화를 받는다. 


다짜고짜 고함부터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듯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이 있다. 어느 경우든 휩쓸리면 안 된다. 정말 가끔이지만 나 때문에 돈을 못 받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위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당장이라도 수화기를 집어던지고 싶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심이 혀끝을 맴돌지만 가족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꾹꾹 눌러 내린다. 그렇게 끝까지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또 어떤 경우, 나랑 이야기해봐야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짜고짜 대표를 바꿔달라고 한다. 정말 그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내 윗사람일 거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돼서도 안 되는 게 조직체계다.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늘 뒷짐 지고 있다. 나 같은 담당자를 두려고 월급을 준다. 결국 평행선을 그으며 상대방의 화가 풀려야 대화는 마무리된다. 그렇게 내 감정은 누르고 들어야 한다. 말을 들을 땐 맞장구 쳐주며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들도 처음엔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내가 듣고 있다는 걸 알면 차츰 누그러진다. 상대방이 누그러졌을 때 조심스레 내 사정을 읍소하듯 꺼낸다.

“반장님 사정은 저도 이해해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며칠 내로 수금이 된다고 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수금되면 제일 먼저 해결해 드릴게요.”

최대한 예의를 차려 말하면 그들도 내 말을 들어준다.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지만 최대한 진정성을 담는다. 내 진심을 알아줘서인지 가끔은 대화의 끝에, 

“차장님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윗사람이 시키니 그렇게 말한다는 거 다 이해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반대로 나도 위로받는다. 어차피 나도 그들과 같은 한 달 벌이로 사는 입장이라는 걸 이해해주는 것 같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대화를 나누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선지 말끝이 무뎌져 있다. 그들의 말끝이 무뎌질수록 내 속엔 꺼내지 못한 말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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