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는 건 접어두기로
한 번뿐인 신혼여행,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싶었고,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추억(?)은 신혼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2008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결혼식 다음 날 출발하기로 했다. 우리는 외부활동보다 편안한 리조트에서 쉬는 걸 선택했다. 굳이 여행사 패키지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항공권과 숙소만 예약하면 될 것 같았다. 웨딩 플래너가 예식 전체를 계획하고 돕는 역할을 한다면, 나처럼 자유 일정으로 여행할 수 있게 돕는 게 '여행 플래너'라고 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된 여행 플래너에게 우리가 계획한 일정을 문의했다. 플래너는 가장 저렴한 항공권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숙소를 대신 예약해줬다. 또, 4박 5일 동안 숙소에만 있으면 지루할 수 있으니 한 두 번 정도는 외부 일정을 넣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대신 몸 쓰지 않는 걸 추천했다. 숙소에서 차를 타고 이동해 크루즈에서 석양을 감상하며 저녁을 먹는 일정을 추천했다. 저녁 한 끼니는 분위기 잡고 배 터지게 먹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출발하기 3개월 전 일정을 확정 지었다.
2008년, 환율이 심상치 않았다. 년 초 미국 발 경제 위기가 전 세계를 덮쳤고, 우리나라도 피해 가지 못했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환율은 요동치고 있었다. 11월, 환율은 신혼여행에 직격탄을 날렸다. 꾸준히 오른 환율은 10월에는 1300원 대가 되었다. 8월에 예약한 항공권은 10월이 되면서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고 연락 왔다. 추가로 20%를 더 냈다. 숙박비도 환율을 감안해 계산해보니 당초보다 50% 이상 더 지출하게 될 것 같았다. 현지 경비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신혼여행을 출발하는 그즈음 1500원대까지 치솟았다. 다른 일정을 안 넣길 잘했다고 애써 위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취소 수수료만 없다면 여행을 미룰 생각도 했었다. 결국 취소 수수료가 아까워 무거운 두 발을 끌며 비행기에 올랐다.
숙소에 짐을 풀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1만 원이면 먹을 수 있는 한 끼를 1만 5천 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갑 열기 망설여졌다. 그래도 이왕 온 거니 편히 있다가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쓸데없는 지출은 최소화했다. 크루즈 디너도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없으면 추억으로 남길만한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기대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크루즈 디너는 둘째 날이었다. 첫날은 숙소에서 보냈다. 둘째 날 오전은 수영장과 해변을 오가면 여유를 만끽했다. 점심을 먹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플래너가 알려준 시간에 로비로 갔다. 입구에 기다리고 있으면 현지 가이드가 나를 찾을 거라고 알려줬다. 가이드가 우리를 크루즈까지 태우고 가는 방식이었다. 10분 늦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20분까지는 도로 사정 때문이겠지 생각했다. 30분째 되니 슬슬 불안했다. 로비 안 밖을 오가며 현지인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우리를 태우러 온 사람은 없었다. 1시간째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출발 전 플래너에게 시간만 확인하고 현지 가이드 연락처를 따로 받지 않았다. 이럴 일이 생길 거라 전혀 짐작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한국에 있는 플래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1시간째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오네요.”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빨리 확인해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
두 어 번 통화를 주고받은 뒤 결국 일정이 취소되었다. 현지 여행사의 실수로 우리가 예약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그러니 현지 가이드도 우리를 태우러 오지 않았던 거다. 어이없는 실수로 기대했던 일정마저 날려 버렸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환율 때문에 참아야 했다. 대신 크루즈 디너로 위안을 삼으려 했었다. 한국이었다면 불이 나게 전화하며 어떻게든 했겠지만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플래너에게 전화도 안 하려고 했었다. 이미 벌어진 일 묻고 따져봐야 바로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다 운이 없었나 보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혼자 있었다면 그렇게 넘어가고 말았을 거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플래너에게 물어봐야 했다. 플래너는 연신 사과를 했다. 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전화기를 붙잡고 잘잘못을 따져봐야 감정만 상할 뿐이었다. 플래너는 대신 다음 날 오후 가이드와 발리의 관광지를 다녀오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는 것보다 그거라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다음 날 약속 시간을 알려주었고 플래너의 사과를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내가 잘못한 일은 나를 탓하면 그만이다. 상대방이 잘못 한 일로 내가 피해를 본다면 상대방이 바로 잡아야 한다. 그때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떤 부분을 바로 잡고 싶은지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바로잡는 기준은 실수한 사람이 아닌 피해를 본 사람이어야 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겐 당연한 권리이다. 아니 권리를 주장하지 않아도 당연히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나는 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내가 바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설령 내 뜻이 반영되지 않아도 잘못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내 주관보다 타인의 시선에 더 신경 쓰고 살 때였다. 그런 우유부단함 때문에 평생 한 번뿐이 신혼여행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