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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28. 2021

대화를 하다 또 삐걱된다

못하는 건 접어두기로

고치고 싶은 습관이 있다. 대화중 불쑥 튀어나온다. 이해관계로 엮인 사이에서는 덜 그런다. 가족 사이에는 특히 심하다. 대화 내용이 거슬리면 입을 닫는다. 내 생각과 다르게 말하거나 단정 짓는 식의 말을 하면 특히 더 신경을 세운다. 상대방도 예상치 못한 내 반응에 놀라기도 한다. 그런 대화의 결말이 안 좋은 건 당연하다.


"요즘 힘든 일 있니?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인다."

"별일 없어요. 잘 먹고 잘 자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아닌데 엄마 보기엔 간이 안 좋아 보이는데, 검사받은 적 있니?"

"작년 말에 받았죠. 별 이상 없어요. 피로회복제 따로 먹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의 말투는 간이 안 좋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런 말투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간이 안 좋으면 얼굴빛이 노래진다고 했어. 엄마가 보기에 네 얼굴이 딱 그래 보인다. 약이라도 한 재 지어줄까?  

"괜찮다니까요, 어머니가 내 속을 들여다본 것도 아니면 그렇게 단정 지어 말씀하지 마세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났다.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말투에서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1년 가까이 식단관리를 하며 안 좋은 음식을 멀리하고 있었다. 건강에 도움 되는 음식으로 먹는 양을 줄여 규칙적으로 먹고 있었다. 건강검진을 받아보진 않았지만 몸무게도 줄고, 피로감 없어지고, 활동량도 늘어 이전과 비교해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물론 정확한 건 검진을 받아야 봐야 알겠지만 어머니는 마치 당신이 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짓는 표현에 순간 화가 났다. 어머니가 자식 건강을 특히 챙기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큰 아들을 보살피지 못한 탓에 먼저 보내야 했던 건 누구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나도 그런 큰 형을 보면서 내 건강을 챙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결심을 어머니에게 내 보이진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니 걱정된 마음에 지레짐작해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 또다시 당신의 자식이 건강을 잃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대화 방식을 무작정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생각을 말하고 어머니의 생각을 들으면서 간격을 좁혀 볼 수도 있다. 정작 중요한 건 그런 대화가 먼저이지 아닐까 싶다.  어머니와 대화가 줄어든 것도 이런 이유였다.


부모님은 자식의 모든 걸 챙겨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자식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어야 한다. 군대를 가기 전까지 나도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군대를 다녀와 독립을 하면서 생각과 행동이 바뀌었다. 나 스스로를 책임지고 싶었다. 부모님은 이런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품속 자식으로 여겼다. 혼자 사는 자식이니 하나부터 열 까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다 한 번 집에 가면 잔소리 같은 걱정을 늘어놓으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니', '돈 번다고 함부로 쓰고 다니면 안 된다', '운전할 땐 천천히 조심해서 하고'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누구에게나 필요한 조언이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걱정할 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어머니의 잔소리와 간섭으로 갈등이 깊었다. 삼 형제 중 막내인 내가 형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장가가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했다. 물론 집안에서 처음 치르는 경사니 신중을 기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한건 아니었다. 문제는 내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점이다. 언제나 어머니 당신의 판단과 결정이 옳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정이 필요한 문제를 상의 하기 위 대화를 시작하면 이미 답을 정해놓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내 의견을 듣기도 전에 이미 어디서 누구에게 듣고 온 말로 결론이 나 있었다. 상견례를 위해 날짜를 잡는 것도 그랬고, 결혼식 날짜를 정하는 것도 그랬고 결혼식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랬다. 그런 대화들이 쌓이면서 나 스스로 입을 닫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말수가 적기도 했지만 결혼 이후 지금까지도 어머니와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대화는 상호작용이다. 내가 말할 땐 상대방이 듣고, 상대방이 말하면 내가 들어주며 반응해야 한다. 주고받으며 의견을 좁혀 결론을 내기도 하고, 한쪽의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나도 그걸 바랐을지 모른다. 답정너 식 대화로 이어지면 더 이상 말하는 게 소용없다고 스스로 결론 낸다. 그때부터 입을 닫고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이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따져 묻기도 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입을 닫았다. 그런 식으로 자리가 끝나면 마음에 돌덩어리 하나 얹은 기분이다.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은 이런 경우 감정을 숨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화를 시도한다. 또 다른 싸움이 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어떤 방법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는 내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대화 중 침묵을 선택했다. 이런 성향은 직장이나 대인 관계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언쟁이 있을 수 있다. 발전적인 결과를 위한 거라면 얼마든 부딪히며 대화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소모적인 내용은 차라리 입을 닫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도 상대방도 조금 떨어져 상황을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다.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 불편해한다. 불편해하는 걸 알지만 나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섣부르게 고쳐보려고 이말 저말 했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어 더 조심스럽다. 갖고 싶은 좋은 습관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듯 고치고 싶은 내 습관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렇게 쓰고 반성하고 다시 노력하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게 아닌 만큼 시간이 걸려도 내가 바라는 나를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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