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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Dec 10. 2021

흰 종이에 글로 찍는다

습작하는 김작가 - 02


때로는 평범한 진술만큼 정확한 표현이 없을 때도 있다. 사진을 들여다보듯 하나하나 선명하고 분명한 어휘로 써야 한다. 심지어 에세이를 쓸 때도 평범한 진술이 한층 더 생생한 글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오후 3시 사무실을 나왔다. 목적지는 6호선 돌곶이역이다. 역에서 1분 거리에 위치한 재건축 조합 사무실에 서류를 제출하러 간다. 점심을 먹고 났을 때까지 내가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나갈 시간이 되자 상무님이 대신 간다고 한다. 좋다가 말았다. 이른 퇴근이 날아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했다. 잠시 뒤 상무님이 전화했다. 다시 나보고 가라고 한다. '앗싸' 당신은 그렇게 먼 곳인지 몰랐단다. 다음 일정이 늦어질 것 같으니 원래 가기로 했으니 나보고 가란다. 이유가 어떡하든 이른 퇴근을 할 수 있다.


두 시간째 지하철이다. 엉덩이가 아프다. 손가락도 아프다. 귀도 먹먹하다. 앉아있는 내내 음악을 틀어놓고  글만 썼다. 시간은 잘 간다. 몇 문장 쓰고 고개를 들면 얼마나 왔는지도 가늠이 안 된다. 6호선 합정역. 이제 버스로 갈아탄다. 


퇴근길, M과 B 사이 고민의 결과는 폭망이다. 괜히 버스로 갈아탔다. 이른 퇴근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적을 줄 알았다. 줄이 좀 길어 보였다. 회차 후 다음 정거장이라 무난히 자리에 앉을 거라 예상했다. 버스도 10분 넘게 기다렸다. 금요일 퇴근길 12차선 도로는 이미 차로 꽉 차있다. 버스가 도착했다. 빈자리 알림판에 숫자 '4'가 적혀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버스에서 나머지 분량을 채우려고 했지만 두 손이 묶였다. 한 사람이 정면을 보고 걸을 때 차지하는 폭만큼의 통로에 20여 명의 사람이 서로의 옆통수를 보며 섰다. 다행히 버스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를 안 잡아도 됐다. 벌 받는 자세는 면했다. 의자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려 버스는 흔들려도 나는 흔들리지 않도록 자세를 취했다. 


며칠 전 퇴근길, 타는 곳이 종점이라 자리 여유가 많았다. 뒷자리에 앉아 정류장마다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봤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크기의 버스였다. 어느새 통로는 사람으로 빼곡했다. 글을 한 편 썼다. 서있는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그날 쓴 글의 제목은 '가방 받아줄까요?'였다. 어릴 적, 30년 전쯤이다. 버스가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빽빽한 사람들 틈에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서있는 사람들의 가방을 받아줬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가방에 파묻힐 정도로 앉아 있는 특권에 책임을 다했다. 내릴 때가 되면 자신의 가방을 찾기 위해 분주했던 모습도 익숙했다. 지금은? 함부로 그랬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도 피곤하고 할 일이 많다. 못 본 드라마, 예능, 영화, 게임에 열을 올려야 한다. 타인을 돕기보다 나의 안락함이 먼저다. 서서 가다 보니 별생각을 다했다.


서서 가니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앉아 있는 사람들과 나와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인다. 영화 보고 게임하고 카톡 하고 인스타 피드 보고 음악 듣고 의미 없이 봤던 앱 또 꺼내보고 자는 사람까지. 두 시 방향에 앉아 있는 아가씨.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지 열심히 셀카를 찍고 있다. 내가 보고 있지요. 마스크 안의 표정은 매우 조심스러워 보인다. 각도를 미세하게 조정해가며 여러 컷을 찍는다. 몇 장을 찍고 내려놓고, 또 얼마 안가 다시 꺼내 찍는다. 마스크가 다 덮을 만큼 작은 얼굴이라 표정이 가늠 안 된다. 맘에 드는 표정의 기준이 있을까? 눈빛? 배경? 마스크? 궁금하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 보는 게 이 글을 쓴 목적이다. 메시지나 의미를 전하려고 쓴 건 아니다. 골드버그 여사님 책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써봤다. 퇴근길 버스 안 풍경을 눈으로 찍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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