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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Dec 27. 2021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다

습작하는 김작가 - 17


어딘가로 떠나기 시작한 사람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의 삶을 그저 기록하라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길이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길을 찾아 떠난 후에야 내 길이 무엇이고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모든 소설 쓰기는 하나하나가 나의 자아들을 찾는 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아는 24시간 전에 발견한 하루와 조금씩 다른 하루를 매일 발견했다.


《화성으로 날아간 작가》 - 레이 브래드버리







제 자신만 책임지면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간섭도,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도 없었습니다.

제 몸 하나 온전히 건사하면 됐습니다.

눈치 볼 게 없었습니다. 

망설이고 주저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지금 서 있는 길에서 다른 길도 자주 기웃거렸습니다.

낯선 길을 좋아했습니다.

처음 가보는 곳도 주저하지 않고 일단 걸었습니다.

걷다 보면 막다른 길도 나왔고,

걷다 보면 처음 보는 풍경과도 마주했고,

걷다 보면 또다시 새로운 길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자신감이 나를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길을 선택하는 용기는 있었지만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책임져야 할 게 없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렸습니다.

나와 아내를 닮은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책임과 사명으로 두 아이를 세상으로 데려왔습니다.

두 아이가 각자의 길을 건강하게 걷을 수 있도록 키우고 있습니다.

혼자일 때의 책임과 가족을 이루고 나서의 책임의 무게가 달라졌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길보다

지금 걷는 길이 익숙해졌습니다.

매일 보는 풍경이 안정감을 줍니다.

낯선 길을 가보지 않겠냐고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거절합니다.

그 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애써 만들어놓은 안락함을 담보로 비포장길을 걷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걷다가 주변을 둘러봅니다.

여전히 컨베이어 벨트 위를 걷고 있습니다. 

처음 이 벨트 위에 올라섰을 땐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제 역할을 하면 안락함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앞, 뒤, 옆 볼 것 없이 아래만 보고 걸었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생산 라인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완제품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내 던져집니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 또 다른 곳에서 제 역할을 하거나,

누군가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한 체 어딘가에서 폐기되고 맙니다. 

나는 어떤 물건일지 생각해 봤습니다.


외형은 여느 물건처럼 그럴싸해 보입니다.

대학을 나오고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안정된 직장에서

내 발로 걸어나가지 않는 이상 잘릴 걱정도 없고

두 아이도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고

아내도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의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직장은 있었지만 직업은 없었습니다.

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술이 없습니다.

시키는 일만 겨우 했습니다.

자기계발은 그럴싸한 포장지입니다.

직업이 없다는 건 은퇴 이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노후 대비는 남의 일이었습니다.

모아둔 돈도 없습니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였습니다.



정신을 퍼뜩 차렸습니다.

제일 먼저 주변을 자세히 둘러봤습니다.

새로운 길이 있는지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보지 않았지만 갈만한 가치가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어딘가로 계속 이어지는 그런 길이길 바랐습니다.

보이는 길을 하나씩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서있는 길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길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기록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록 자체가 의미 있어졌습니다. 

기록이 쌓이면서 주변의 길들이 선명해졌습니다.

걸어온 길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하나씩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길을 좋아했고,

어떤 길에서 방황했고,

어떤 길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는지 적었습니다.


낯선길을 걸어봐야 내길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기록을 하게 되면서 걸어온 길에서

조금씩 벗어나 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에서 가능성도 봤습니다.

걷던 길을 벗어나니 

어떤 길을 걸었는지 보였습니다.

낯선 길을 걸어보니 

그 나름의 재미도 있습니다.

재미를 찾으니 더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재미와 호기심에 이끌려 두 개의 길을 오가고 있습니다.

걸어온 길도 기록하고

걸어가고 있는 길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길을 기록하는 사람, 

작가입니다.

이 길에 들어서고 

이 길에 확신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내 몸 하나 겨우 지나는 길이지만

이곳을 지나면 

내 가족은 물론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걷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해질 거라 확신합니다.

이 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내가 가고 싶은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길을 보고만 지나쳤으면 어떤 길인지 모릅니다.

보이는 길에 들어서고 걸어봐야 

어떤 길인지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가라는 직업,

시도해 보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시도하고 도전하고 깨지고 무너져보니

어떤 직업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지금 몸 이곳저곳이 까지며 피가 나도

그 상처가 아물 때쯤이면 

더 단단한 새살이 돋아날 테고

더 넓은 길을 걷게 될 거라 믿습니다.

용기 내 이 길에 들어섰기에

지금 이렇게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매일 새 글을 쓰면서

조금씩 다른 하루를 

매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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