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름다운 사람

직장을 도망치며 깨달은 한 가지

by 김형준

"이 업계 있으면 돌고 돌아서 언젠간 만나게 됩니다."

시작보다 끝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직장인의 덕목 중 하나입니다. 서른 살부터 시작한 직장생활 중 두 번 도망쳤습니다. 한 번은 입사 두 달 만에, 또 한 번은 여섯 달을 못 채웠습니다. 두 경우 다 냉정하지 못했고 그럴 수 있다고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그 순간은 몰랐습니다. 후회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여전히 그때가 선명합니다. 무책임했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직장만 다닐 줄 알았지 직장인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직장도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사람으로서 기본 도리를 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서른다섯, 입사 두 달 만에 도망치듯 뛰쳐나왔습니다. 당시 직장은 건설수주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탄탄한 곳이었습니다. 수주실적이 많다는 건 두고두고 일 할 거리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월급을 못 받거나 고용이 불안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조직 규모가 크다 보니 할 일이 많았습니다. 팀장 포함 셋이서 20여 개 현장에 필요한 건설자재를 구매하는 업무였습니다. 8시에 의자에 앉으면 12시에 일어날 수 있었고, 점심밥만 먹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 6시에 일어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6시에 퇴근하는 건 아닙니다. 저녁만 먹고 10시까지 낮에 못한 서류 작업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놓고 퇴근했습니다. 입사 후 한 달을 두고 보던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너무 힘들면 다른 데 알아보는 건 어때?"

"아니야, 힘은 들어도 일은 재미있어. 곧 익숙해지겠지."

일은 재미있었지만 익숙하지 않아 힘든 거라 생각했습니다. 업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버텨서 자리만 잡으면 이만한 직장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그 일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직장인에게 요구되는 다양한 덕목이 있습니다. 그중 단연 '존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월급쟁이라면 어떠한 상황도 참고 버틸 수 있어야 했습니다. 억울한 일도, 이해 안 되는 상황도, 의견을 무시당해도 모두 내 탓이라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억울하다고, 이해 안 된다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 득달같이 달려들면 순식간에 눈 밖에 나기 십상입니다. 입사 두 달도 안 된 저에게 억울한 일이 생겼습니다. 인수인계를 받았지만 스토리를 전혀 알 수 없는 일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타 부서 담당자를 차례대로 만났지만 아무도 시원히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팀장에게 물어도 '그건 네 일이니 알아서 해야지'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해결하지 않으면 모두 뒤집어쓰게 생겼습니다.


직장이든 사람 사이든 해결 안 될 일은 없습니다. 매달리다 보면 언젠가 해결되고 답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땐 그걸 몰랐습니다. 모두 제 탓으로만 떠넘기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달도 안 된 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가혹하다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야근에 철야를 하며 몸이 피곤한 게 낫지, 억울한 일로 마음이 불편한 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표도 안 쓰고 무단이탈, 잠수로 퇴사 의사를 전했습니다. 팀장의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무시했습니다. 아내에게도 이틀 뒤 조심스레 털어놨습니다. 아내는 이해해 줬습니다. 혹사당하는 것 같았지만 제가 좋다고 하니 더는 말하지 않았던 아내도 한시름 덜은 눈치였습니다.


어찌 되었든 제 행동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도망갈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게 맞았습니다. 그때는 불합리한 상황에 당하는 제 자신만 보였습니다.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끝이 아름답지 못했던 그때가 그래서 더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해결을 하려고 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책임질 일도 아니었습니다. 잘못된다고 회사가 뒤집어질 일도 아니었습니다. 설령 잘못돼도 책임은 윗분들이 진다는 걸 그땐 몰랐습니다. 몰랐고, 이기적이었고, 무책임했기에 후회가 남는 끝을 남겼습니다.


20여 년 직장생활 중 끝이 아름답지 못한 두 번을 경험했습니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게 많았습니다. 이후로 똑같은 짓은 안 했습니다. 나이 들고 경력이 쌓이며 직장인의 덕목을 하나씩 알아갔습니다. '능력은 부족해도 끝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이 업계를 떠나지 않는 이상 다시 만나게 되고 그때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되자.'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직장뿐 아니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는 인간관계도 끝이 아름다운 사람은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욕심만 챙기는 사람은 결국 혼자 남게 될 겁니다. 정작 사람이 필요할 때 곁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나에게 이득을 주는 사람을 찾기보다 내가 무언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GIVE & TAKE'입니다. 주는 게 먼저입니다. 조건 없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도 많다는 의미입니다. '준다는 건' 희생의 의미도 있습니다. 직장인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역할입니다. 불합리하고 힘든 일도 기꺼이 나서서 희생하는 게 결국 나를 위하고 타인을 위한 행동이 될 겁니다.


이제는 직장보다 사람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직장은 머지않아 떠날 곳입니다. 직장으로 빈 곳을 사람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람을 곁에 두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도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걸 기꺼이 나누고, 나의 능력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뛰어난 사람이기보다 솔직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리송한 사람이기보다 선명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보다 투명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더는 도망치는 그런 일을 없어야 합니다. 직장은 다시 구할 수 있었지만, 한 번 잃은 사람은 다시 되돌릴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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