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내 일을 찾는 여정, 업-ROAD

by 김형준

나는 대체 가능한 인력이었다. 내 업무는 다른 사람을 앉혀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로 타 부서를 돕는 역할이었다. 자재구매, 견적, 월 마감, 대관업무, 행정업무 등 단순 반복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A부터 Z까지 한 번 파악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다. 창의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쩌면 창의성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창의적으로 일하지 못했다. 단순한 게 좋았다. 머리 쓰는 게 싫었다. 십수 년 같은 일을 하면서 잘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태도 때문인지 내 일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의지가 있었다면 얼마든 창의성을 발휘해 나만의 영역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대체 가능한 업무를 반복했고, 어디 가서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 같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 말이 있다. 원래 있던 사람이 없어지면 잠깐은 불편하다. 그 잠깐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인수인계 이후 퇴직하는 게 직장인의 덕목이 되었다. 회사 입장에서 직원의 업무 공백은 유무형의 손실을 입히기도 한다. 같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업무 쏠림을 겪고, 반대로 대표는 빈자리를 메우는 데 비용과 시간의 금전적 손실이 발생한다.


'채용실패비용'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해고에 따른 비즈니스 기회비용 및 고용인이 끼치는 간접적 손실비용을 의미한다. 수치로는 평균 연봉의 24배에 달하는 비용이 발생한다고 추산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직원 한 명을 뽑는 데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검증에 필요한 절차를 추가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한다. 면접관으로 관상가가 대동하는 건 이미 오래전 일이 되었다. 아무리 검증을 거친다 해도 실제로 얼마나 자기 역할을 해낼지는 직접 일을 해봐야 확인할 수 있다. 잡코리아 통계에 따르면 신입 사원의 입사 1년 미만 이직 경험이 37%인 건 채용과정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1년 내 이직을 한다는 건 회사 입장에선 충분히 검증을 못했고 지원자도 신중하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 있다.


그럼 회사와 근로자가가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윈윈'의 의미는 기업과 근로자의 이상향이 만나는 접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개인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낼 장과 그에 적합한 보상을 마련해주고, 근로자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여 기업 이익 극대화에 일조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표현이다. 실제로 이런 관계가 되는 건 쉽지 않다. 기업은 기업대로 최소비용 최대 효과를 바라고, 근로자도 최소 노력 최대 보상을 바라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희생만을 강요할 수도 없다. 기업과 근로자 간 문제에 따라 접근법이 다르겠지만 근로자가 우위에 설 수 있는 방법은 대체 불가 인력이 되는 것이다.


어느 직무나 핵심역량이 있다. 마케팅은 차별화된 생각, 회계는 숫자를 다루는 논리력, 기획은 예측과 통계, 영업은 친화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밖에도 각각의 업무 성격에 따라 필수, 필요 역량이 있기 마련이다. 근로자도 사람이라 모든 걸 다 갖추는 건 무리다. 하지만 적어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역량은 필요하다. 이미 갖고 있다면 더 발전시키고, 아직 부족하다면 더 개발해야 한다. 나도 십수 년 같은 일을 해왔지만 딱히 핵심역량이라 할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자세히 보니 그래도 한 두 가지는 있었다. 구매 업무 비중이 높다 보니 다양한 사례를 경험했고, 가격을 협상하는 능력은 적어도 직원들 사이에선 도드라진다. 가격이 결정된 구매 건도 내가 나서면 적어도 중간 숫자 정도는 바꾼다. 몇 천 원, 몇 만 원을 깎은 게 쌓이면 원가절감으로 이어진다. 결국 기업의 이익이 되는 것이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천재 한 명이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며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현실 세계의 우리는 천재 한 명이기보다 십만 명 중 한 명으로 살고 있다. 그 안에 존재하지만 나름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십만 명이 제 역할을 해내야 결국 천재의 아이디어도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도 무색무취의 직원보다 비슷비슷한 색이지만 그래도 차별화된 색을 내는 직원을 바랄 것이다. 또 직원 한 명 뽑기 위해 치러야 할 기회비용을 감안한다면 재직자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투자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다. 근로자도 지금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게 메뚜기 마냥 옮겨 다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9번 이직을 경험해 본 결과, 같은 업에서 퀀텀 점프(기업이 사업구조나 사업방식 등의 혁신을 통해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실적이 호전되는 경우를 나타내는 용어. -출처 네이버)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며 존재감을 갖는 게 오히려 다음 이직이나 전업에 유리하다는 걸 알았다.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 걸.


직장인의 업무는 무한 반복이다. 같은 부서 선임이 했던 업무를 내가 이어받고, 내가 했던 일을 내 후임에게 이어주는 식이다. 조직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대로 따라가는 게 전부다. 사람이 엮이다 보니 문제가 생기고, 문제 해결 능력에 따라 자신의 역량을 평가받는다. 바꿔 말하면 업무 능력이 탁월하다는 건 그런 문제들이 적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좀 더 신랄하게 말하면 상사에게 고민거리를 덜 안겨 주는 게 능력 있는 후배가 되는 것이다. 그런 능력이 상사의 눈에 띈다면 대체 불가 인력이 된다.


물론 단적인 예이긴 하다. 한 사람의 역량을 하나의 능력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반대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조직이 나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 본다면 모든 일에 탁월한 팔방미인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탁월한 사람이 된다면 좋겠지만 고 이건희 회장이 말했듯 1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건 '천재'라고 이미 단언했다. 그럼 그 10만 명 중 한 명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한 가지 역량에 집중하고 탁월함을 갖는 것. 그걸 찾고 발전시키는 건 각자 몫의 숙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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