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정조는 당시 '문체반정'의 원흉으로 박지원을 지목한다.
그가 쓴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온 지 10여 년도 지난 시점이었고,
어떤 활동도 없이 조용히 노년을 보내던 그에게 사건의 배후라 지목한다.
이는 당시 박지원의 글이 갖는 파급력을 임금도 인정하는 반어적인 사건이었다.
정치와는 멀어질 때로 멀어진 그가 어떻게 이런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의 청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답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지원은 요즘 말로 엄친아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수려한 외모에 일찍이 글을 익혀 엘리트 코스로 정해진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십 대 후반 과거 공부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우울증은 그를 저잣거리로 나서는 계기로 만든다.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 마이너 인생을 가기 시작한다.
그가 만나는 이들은 분뇨 장수, 이야기꾼, 시정잡배 등 다양한 부류와 교류하게 된다.이들과의 교류는 더 이상 그를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와 이별을 고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사대부의 엘리트가 과거를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건 시간뿐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채워 갔다.
친구를 좋아했던 그의 기질 덕분에 당시 당파식의 편가르기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의 친화력은 당파를 뛰어넘은지 오래였으며, 그의 글과 사유의 깊이는 그를 더욱 찾게
만드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소셜네트워크의 파워유저로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이덕무, 박제가 등 다양한 인맥으로 만든 백탑 청연은 시서화를 넘어온 우주의 만물을
포함할 만큼 그 범위가 넓었으며 이는 곧 그의 관심과 어디까지 미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박지원은 청 문명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학 이념을 탄생시켰다.
그의 44세 때 마침내 중국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여정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정해진 목적지인 '연경'이 아닌 황제의 휴가지였던 열하로 변경되었고,
이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구베이커우 장성을 넘었다는 기록으로 남게 된다.
박지원 이 과정에서 그의 글쓰기 본능이 발휘된다.
이때 쓴 글이 바로 『열하일기』였다.
『열하일기』당시 조선을 흔들어 놓을 만큼의 파급력이 컸으며 조선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의
책은 정식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이 떠돌며 아류작을 만들어 내게 된다.
『열하일기』는 일정한 틀이 없이 다양한 사고를 넘나드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를 우려한 정조는 문체반정의 배후로 지목하기에 충분한 명분을 준 셈이었다.이는 역설적으로 18세기 지성사를 논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박지원은 정해진 틀 속의 삶을 거부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춰 다양한 사람과의 교류를 선택하게 된다.
그는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관심분야로 생각을 넓혀 나갔다.
그는 글을 쓰고 사유하며 새로운 정보와 문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항상 깨어 있었다.
그는 항상 다르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의 글을 파격적이었다.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못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힘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정해진 틀 안에서 교육을 받고,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생활을 이어간다. 자란 환경이 비슷하다. 환경이 비슷하니 생각도 비슷하게 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양성의 시대다.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생각과 관계의 폭이 무한대로 확장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소셜네트워크는 이런 확장성의 근간이 되었다.
박지원의 삶 속에도 이런 인적 네트워크가 풍부하게 형성되었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독창성 찾았고 깊이를 더하기 위한 노력을 평생이어갔다.
우리의 삶도 인적 네트워크속에서 이루어진다.
다 같은 생각, 관점, 행동속에서 나만의 아이덴티디를 찾아야 한다. 타인과 구분되는 독창성.그 독창성이 자신만의 콘텐츠가 될 수 있고, 콘텐츠를 갖는것이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