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의 역사
12월 30일 밤 9시, 퇴근 후 다시 돌아간 사무실은 난장판이었다. 사무실 한쪽 방에서 살았던 사장은 운전석만 남겨두고 살림과 고가 장비를 싣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명령처럼 필요한 걸 챙겨 가라고 했다. 무슨 상황인지 듣지 못하고 일단 싣기 시작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사무실에 두는 건 뻔했다. 업무용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다. 나는 다 챙겼지만 사장은 여전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도와 달라는 말도 안 한다. 가만히 두고 봤다. 9년을 함께 했지만 속을 안 보여줬다. 지금 이 순간도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묻지도 못했다. 묻는다고 대답해줄 사람이 아니다. 끝나길 기다렸다. 위층 건물주인이 눈치라도 챌까 나지막이 다시 보자는 말만 남기고 출발했다.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첫 직장을 잃었다. 29살이었다.
서른 살의 새해를 실직자로 맞았다. 10년을 알고 지낸 대학 동기가 새해 인사 겸 연락이 왔다. 지나는 말로 백수임을 밝혔다. 동기는 내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며칠 뒤 연락이 왔다. 전공은 다르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니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알려준 장소와 시간에 면접 보러 갔다. 어떤 면을 좋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임시직으로 일 할 수 있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좋은 사람과 탄탄한 회사에서 두 번째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3년 차 고비는 넘겼지만 깜냥이 부족했다. 소장님이 있기 했지만 50억 현장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도망치기 위해 알아본 직장이 좋은 조건 일리 없었다. 주말부부를 감내하며 두 번째 이직을 했다. 35살이었다.
세 번째 직장은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주말 부부이면서 주중엔 야간 수업을 들었다. 그즈음 큰 딸도 태어났다. 떨어져 지내는 걸 고민했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고 또 급하게 일자리를 알아봤다. 졸업장도 없고, 경력은 짧고 나이도 많은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조건을 낮추고 낮춰 겨우 자리를 구했다. 9시 출근 6시 퇴근이었다. 업력도 짧고 규모가 작아서 업무가 많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았다. 욕심 없이 가늘고 길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무가 새로 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번번이 부딪혔다. 나이도 경험도 말도 많은 분이라 자부심이 강했다. 본인이 말이 진리이고 토 다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나랑 맞지 않았다. 몇 번 부딪혔고 결국 내가 도망치듯 나왔다. 직장을 구해놓지도 않았다. 두 달을 놀면서 직장을 구했지만 네 번째 직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면접관의 말을 믿은 게 실수였다. 본인이 그만두기 위해 나를 뽑았다는 걸 입사 후 알았다. 그런 회사가 오래갈 리 없었다. 5개월 만에 폐업했고 3개월 치 월급을 못 받았다. 월급도 못 받고 새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한 체 쫓기듯 나왔다. 다시 백수가 되었다.
매일 출근하듯 집을 나와 도서관으로 갔다. 컴퓨터는 하루 한 번 3시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소장님을 찾아갔다. 인사권을 가진 소장님이라 흔쾌히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채용이 결정된 날, 꼭 가고 싶어 벼르고 있던 회사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합격 소식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출근하는 날 아침 소장님에게 통보식 이메일을 보내고 다섯 번째 직장을 갖게 되었다. 상대방의 선의를 외면한 죗값을 치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견기업이라 안정된 자리였다. 나만 잘 적응하면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하고 싶었던 업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고만고만한 회사를 다니다 보니 업무 역량도 틈이 많았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팀장에게 나는 구멍 투성이 직원이었다. 매일 밤 10시 퇴근, 주말 근무로 이어진 두 달 동안 5킬로그램이 빠졌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불편한 건 견디기 힘들었다. 원칙만 고집하는 팀장 성격을 핑계로 이번에는 통보 없이 도망치고 말았다.
세 달을 또 놀았다. 이제는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채용 사이트에만 매달렸다. 매일 수시로 채용 사이트를 뒤졌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전화기로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일곱 번째 채용은 하늘이 도왔다. 채용 사이트에 올린 이력서를 보고 먼저 연락이 왔다. 본인을 같은 대학 선배라고 소개했다. 입김이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일 자리를 얻었다. 인천에서 제법 탄탄한 기업으로 알려져 있었다. 새로 개설하는 현장에서 새로운 각오로 시작했다. 직장 운은 없어도 사람 복은 있었다. 그때 만난 동료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내 운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입사 후 10개월째부터 월급이 안 나왔다. 월급을 못 받은 직장을 다녀봐서 더 이상 미련하게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또다시 이직을 준비했다. 이틀이 모자란 1년을 채웠지만 월급도 안 나오는 곳에서 퇴직금을 기대하는 건 괜한 시간 낭비였다.
일곱 번째 직장은 집에서 10분 거리였다. 연봉도 이전 직장보다 20퍼센트 이상 올랐다. 신생기업치고는 수주도 제법 있었다. 구매를 전담하는 업무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온 가족이 경영에 참여한다는 게 얼마나 최악인지 그때는 몰랐다. 파푸아 뉴기니 정부에서 발주한 도로를 건설하는 공사를 여럿 수주했다. 잘만 하면 탄탄한 기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근무하는 동안 온갖 갑질의 향연이 이어졌다. 그런 회사에 무엇을 기대하겠다고 월급을 14개월 동안 못 받아도 버텼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만두면 못 받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억지로 버텼던 것 같다. 결국 고소 고발로 이어지는 진흙탕 싸움 끝에 반년 치 월급밖에 건지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여덟 번째 직장은 상장사였다. 드문 경우였다. 월급 밀릴 걱정은 없었다. 상암동이라서 출퇴근도 수월했다. 연봉을 낮출 수밖에 없었지만 멀리 보기로 했다. 건설보다 제조가 주력이다 보니 업무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 때문인지 업무도 수동적으로 했다. 불편한 걸 개선하기보다 시키는 것만 하려고 했다. 그러니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상이 불만으로 쌓여갔다. 직장 스트레스를 아내와 아이에게 풀었고, 잦은 술자리로 시간을 낭비했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면서 나 자신을 더 괴롭혔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삶을 바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홉 번째 직장은 내 의지대로 선택했다. 2018년 첫날부터 책을 읽었다. 아무런 기대 없었다. 홀리듯 시작해 기름에 옮겨 붓듯 삽시간에 타올랐다. 6개월 만에 100여 권을 읽었다. 읽을수록 마음의 안정도 되찾았다. 그즈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예전 소장님에게 연락을 받았다. 당신이 다니는 직장으로 옮길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때의 선의를 보답할 기회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아홉 번째 직장을 5년째 다니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았다. 그 덕분에 열 번째 이직을 준비 중이다. 이번에도 오롯이 내 의지에 따라서다. 남이 만들어 놓은 직장이 아닌 내가 만든 나만의 일을 가졌다. 여전히 매일 시험 중이다. 읽고 쓰고 나누며 사는 게 나와 맞는지. 5년을 돌아보면 아직은 잘 맞는 것 같다.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아홉 번의 이직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내 경험을 통해 나 같은 실수를 안 했으면 좋겠고, 내 경험을 통해 나처럼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았으면 좋겠다.
“변화의 시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는 인간과 세상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구본형 작가의 말이다. 각자의 생김새가 다르듯 살아가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고 잘하고 잘 못하는 부분을 이해하게 된다. 단점은 단점대로, 장점은 장점대로.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