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딸, 여자는 여전히 어렵다

by 김형준

2022. 07. 24. 08:07


토요일 오전 11시 반, 그분이 오셨다.

엄마 아빠 들으라는 듯 풀고 있던 학습지를 요란하게 덮는다.

발에 체중을 실어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간다.

칫솔을 물고 있는 모습은 마치 차인표 배우가 열연했던 드라마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방 문은 닫혀있지만 그 안에서 무얼 하는지 소리로 보인다.

서랍장을 여닫는 소리, 가방에 책을 넣는 소리,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는 소리.

학원 가기 싫다는 마음을 행동과 소리로 대신하고 있다.


매주 반복된다.

원하면 학원을 안 다녀도 된다고 말했다.

학원을 다니는 게 싫은 건 아니라고 한다.

이왕 다닐 거면 기분 좋게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토요일에 자기만 학원을 가는 게 억울해서 짜증이 난다고 한다.

짜증이 날 정도면 시간을 옮기거나 학원을 옮겨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지금 다니는 학원이 자신과 잘 맞아서 옮기고 싶지 않단다.

그럼 매주 눈치를 봐야 하는 엄마 아빠는 어쩌란 말이냐?


큰딸의 짜증을 시작으로 아내까지 짜증을 낸다.

난데없이 책상을 치우라며 소리를 지른다.

몇 주째 자리를 지키던 애먼 내 책에게 화풀이를 한다.

어제저녁 꺼내놓은 둘째의 교과서에도 화풀이가 이어진다.

기분 좋게 TV를 보고 있던 둘째와 나에게로 화살이 날아왔다.

큰딸은 학원으로,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덩그러니 남은 둘째와 나는 졸지에 눈치 없고 집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몇 분 사이 벌어진 일이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우물 속 깊이 던져 놓았던 짜증이라는 감정이 밧줄을 타고 올라온다.

짜증이 짜증을 내며 우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나는 입을 닫아버렸다.

거실 책상에 앉아 책과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했다.

큰딸이 와도, 둘째가 봐도 눈도 안 마주쳤다.


학원이 끝나서 홀가분한지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온 큰딸.

그런 큰딸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아내.

짜증이 났던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고, 너무도 평안한 표정을 서로에게 지어 보인다.

저게 가능해?

내가 이상한 건가?

저 둘을 이해 못 하는 내가 잘못된 건가?

이 상황에서 나도 방긋 웃으며 아무 일 없듯 맞장구를 쳐야 하나?


힘겹게 올라온 짜증이라 그런지 쉽게 내려가지도 않았다.

아내가 차려준 점심도 패스했다.

저녁밥은 아내가 직접 만든 스파게티 대신 점심에 남겨 둔 식은 볶음밥을 대신 먹었다.

아내 앞에서 보란 듯이.

김이 올라오는 스파게티 면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둘째를 옆에 두고도.

유치했다.

무언의 시위였다.

이런 내가 이해 안 되는 듯 아내의 설거지 소리가 요란하다.

손도 안 댄 스파게티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는 소리도 들린다.


밤 사이 내 짜증도 피곤했는지 기운이 떨어진 것 같다.

슬슬 원래 그곳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다.

힘겹게 올라왔지만 갈 때는 편하게 보내야겠다.

미안하지만 등 뒤에서 밀어버려야겠다.

그래야 쉽고 빠르고 편하게 돌아갈 테니 말이다.

이놈을 보내고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여자만 셋인 인 집에서 내가 살아남을 방법을.

이미 진행 중인 큰딸의 사춘기,

아직 오지 않은 둘째의 사춘기와 아내의 갱년기.

태풍 안에서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내 살 길은 찾을 수 있다.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 잡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겠다.

아내도 여자고, 딸도 여자다.

나는 남자다.

남자는 남자가 이해하고 보살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2022. 07. 2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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