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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ug 07. 2022

키가 작아지는 장모님

2022. 08. 07.  14:08



틀어진 문틀에 위쪽만 낀 주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깹니다. 장모님은 오늘도 5시에 일어났습니다. 곤히 자는 자식 손자가 더울까 마당으로 향한 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어 놓습니다. 주방과 마당을 오가며 아침밥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 때문에 사위가 일찍 깼을까 싶어 누운 채로 발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몸을 좌우로 돌리며 잠이 깨는 척을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방충망을 열고 툇마루에 섭니다.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척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인사를 건넵니다. 장모님도 "으이, 잘 잤는가"인사해 주십니다. 그러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십니다. 멀뚱히 있는 게 싫어 동네로 나갑니다.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사위, 장모로  14년째입니다.


자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장모님은 마음이 급합니다. 두 딸에게 아침 준비를 맡기고 밭으로, 주방으로, 마당을 오가며 목에 두른 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습니다. 깻잎 짱아 치를 잘 먹는 사위와 아들을 위해 수백 장은 족히 돼 보이는 깻잎을 몇 차례 씻어냅니다. 잘 씻은 깻잎을 한 장씩 포개며 양념장을 켜켜이 발라줍니다. 이미 방을 차지하고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는 손자 손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장 한 장에 당신의 마음을 바릅니다. 남은 한 장까지 정성을 다한 뒤 다시 주방으로 발을 옮깁니다. 'GOLD STAR'로고가 선명한 냉동고 문을 열고 하나씩 꺼내 준비된 아이스박스에 나누어 담습니다.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이 순간을 위해 차곡차곡 쌓아둔 식재료들입니다. 자식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 틈틈이 쟁여놓았던 것 같습니다. 누가 보면 버리기 아까워 빈틈없이 욱여넣은 남은 음식 정도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흰 봉지, 검은 봉지에 대충 담아 입구를 쪼매 놔 볼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행여 하나라도 빠트릴까 싶어 보고 또 보며 사이좋게 나누어 담습니다. 목에 두른 수건은 이미 축축해진 것 같습니다.


갈 길이 먼 자식들은 떠날 준비를 서두릅니다. 가방을 싸고 옷을 갈아입은 모습을 보면서 장모님도 손이 바빠집니다. 빠진 게 있나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는 동안 더디게  녹길 바라는 마음으로 테이프를 몇 바퀴씩 돌려 봍입니다. 두 시간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건 먹고 씻고 떠날 준비만 했습니다. 오가며 허리를 숙인 뒷모습만 봤습니다. 가뜩이나 작은 키, 더 작아 보였습니다. 전날 친척집에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장모님과 단 둘이 걸었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길, 어둠만큼이나 적막했습니다. 살갚지 못해 기껏 "건강은 어떠세요?"물었고, "암시롱 안 해" 대답하십니다. 다시 주변의 어둠과 고요에 파묻힙니다. 두 발 앞서 걷습니다. 저 앞 가로등 빛을 지나면 대문이 나옵니다. 두 발 앞선 사위 등을 보고 장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작은 아들이 먼저 출발합니다. 대문 밖에서 아들이 부르지만 나와보시지 않습니다. 쩌렁한 목소리로 "조심히 가거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그 뒤 막내딸과 사위도 준비를 마쳤습니다. 배 들어오는 시간을 물으니 서둘러 TV를 켜시면 선착장을 비추는 화면에 눈을 고정하십니다. 때마침 선착장 주차장에 둘째 아들의 자동차 뒷모습이 보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환하게 웃어 보이십니다. 장모님의 미소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요?


큰아들에게 보낼 음식까지 제 차에 실었습니다. 손녀와 마직만 인사를 나눈 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습니다. 동네를 벗어나기도 전에 전화가 옵니다. "참기름 빼먹었다" 아내가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합니다. 저 멀리 엄마가 보였나 봅니다. 참기름이 담긴 병을 받아 들고 차로 돌아온 아내는 트렁크에 뒹구는 수건으로 눈가를 훔칩니다. "매번 저렇게 혼자 서 있었나 봐" 저도 아내 눈을 피해 운전만 했습니다.


장모님 댁에 가려면 길 위에서 10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만만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갈 엄두를 못 냈습니다. 2016년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내년에도 간다고 장담을 못합니다. 올라와 달라고도 못 하겠습니다. 더 작아진 키를 보니 말을 못하겠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못 갈 핑계를 찾지 말고 갈 수 있는 기회를 더 자주 만들도록 해야겠습니다. 길 위의 시간은 힘들었지만 장모님의 정성으로 피로를 풀 수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풍성해진 휴가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장모님.


2022. 08. 0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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