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딸에게 줄 수 있는 영양제

by 김형준

2022. 10. 25. 07:36



몇 달을 벼른 끝에 키 성장에 도움을 주는 영양제를 샀습니다. 처음 알아본 제품은 입증된 효과를 내세워 월급의 절반을 주면 먹을 수 있다고 꼬셨습니다. 내 자식 키 크는데 그 정도는 투자할 수 있다고 결심하고 지르려고 했지만 차마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주저하던 제게 인스타그램의 빅데이터는 가성비가 괜찮은 제품을 추천해줬습니다. 어머니에게 받은 용돈을 그러모아 결국 결제했고, 지난 토요일 택배로 받았습니다.


운동을 시작하니 택배 도착 알림 문자가 뜹니다. 곧이어 큰딸이 학원 마치고 집에 왔다고 알립니다. 이 말은 점심밥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내는 과제 때문에 학교에 갔고, 둘째는 친구와 춤 연습하러 나가고 없었습니다. 빛보다 빠르진 않았지만 서둘러 운동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둘이 먹기 좋은 점심을 고민하다가 조금 비싼, 꽤 맛이 괜찮은 빵을 사 가기로 했습니다. 네댓 개 담으니 2만 원이 넘습니다. 맛있게 먹으면 그만한 가치 있다 여기고 봉투를 받아 들고 나왔습니다.


큰딸은 나보다 손에 든 빵 봉투에 먼저 눈이 갔습니다. 저는 문 앞에 놓인 영양제에 눈이 먼저 갔습니다. 한 손에 빵 봉투, 다른 손에는 영양제 박스를 들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접시와 포크를 가져와 사온 빵을 먹기 좋게 잘라서 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큰딸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주말 오후, 맛있어 보이는 빵과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영양제를 사이에 두고 대화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남녀노소, 택배 박스는 설렘입니다. 궁금해하는 큰딸에게 박스에 담긴 게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키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양제를 샀다고 말했습니다. 꾸준히 먹으면 키 크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맛과 먹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한 알 먹어보더니 맛은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여기 있는 건 꼭 다 먹어달라고요. 효과를 보면 더 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큰딸도 키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지 꼭 다 먹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음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접시에 담긴 빵을 먹어보고 어떤 재료가 들었는지, 무슨 맛이 나는지, 빵이 비싼 이유에 대해 주고받았습니다. 맛있게 먹는 모습과 맛있는 빵 덕분에 빵 값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자칫 사온 빵을 다 먹을 뻔했습니다. 겨우 이성 되찾아 아내와 둘째가 먹을 걸 남겨두었습니다. 달달한 걸 즐겨 먹는 큰딸도 요즘 먹는 걸 신경 쓰는 눈치입니다. 키도 크고 싶고 건강해지고 싶은가 봅니다. 당이 든 음식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마침 요즘 쓰는 원고가 관련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술술 읖어대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먹지 말라고 말할 땐 이유도 설명해주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좋아하는 걸 무작정 먹지 말라고 하기보다 안 좋은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면 스스로 판단할 하게 됩니다. 당장은 끊기 힘들어도 서서히 줄여갈 수는 있을 겁니다.


넷플릭스를 보게 해달라고 몇 달째 조르는 중입니다. 처음부터 단호히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세상이 떠들썩한 인기 프로그램을 보고 싶습니다. 언제나 처음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호기심에 시작하면 끊는 게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답일 겁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안 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단 둘이 대화하는 지금, 틈을 노려 조르기를 시작합니다. 단서를 달아서 거절했습니다. 시간 활용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학교와 학원을 갔다 오면 밥 먹고 방에 들어가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인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보면 어김없이 손에 든 체 잠들어 있습니다. 잔소리 안 합니다. 두고만 봅니다. 방관은 아닙니다. 기회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넷플릭스를 보고 싶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있다는 걸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큰딸도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학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모두가 납득할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더 똑똑하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그러지 못하니 넷플릭스는 보여줄 수 없다고 결론짓고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30여 분 대화를 나눈 것 같습니다. 예전 성격 같았으면 단 둘이 있어도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따로 있었을 겁니다.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익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라면서 부모님 중 단둘이 대화 나눈 기억이 없습니다. 그저 먹고사는 데 치여 밥 먹고 자고 잔소리하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아들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물어오지 않았습니다. 서글서글한 성격이었으면 먼저 다가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지 못했던 건 제 잘못도 있는 것 같습니다. 탓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때의 부모님은 나름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고 부족한 건 제가 채우면 되는 겁니다. 바라는 삶을 살지 못했다고 나까지 똑같이 살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르게 살고 싶으면 다르게 살면 됩니다. 소통하고 공감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아이들의 키는 영양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 아이들이 원하는 걸 해주기 위해 바쁘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현실만 탓하며 부모로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부모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저도 어쩌다 만들어진 기회였고 큰딸이 마음을 열어준 덕분에 얻은 시간이었습니다. 자주 갖지는 못해도 기회가 생길 때면 정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태도를 보이면 아이도 마음을 열고 다가와줄 거로 믿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아이가 올바로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을 부모인 제가 줄 수 있을 겁니다. 대화하고 공감받고 이해받으며 성장한 아이는 더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로 믿습니다.


2022. 10. 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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