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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23. 2022

찬바람에 추억 한 곁 덮는다

2022. 11. 23.  07:38


어제보다 차가워진 아침 공기를 뚫고 단골 카페 문을 열었습니다. '봄바람처럼 살랑 내 가슴을 또 흔드는 사람 언제나 나에게 그대는 봄이야~'. 때마침 가수 이문세의 노래 한 구절이 들립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여러 번 들어본 곡입니다. 가사를 들으니 봄바람 타고 사랑도 살랑살랑 전해질 것 같습니다. 생각 없이 지나칠 수 있는 노래 가사도 찬바람이 불면 유난히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추운 날 옆구리가 시리다는 표현은 아마도 사람의 온기가 그립다는 의미이지 싶습니다. 창밖에 나뭇가지는 살을 발라놓은 생선가시 같습니다. 나뭇잎이 풍성하던 때는 마음도 덜 쓸쓸했던 것 같습니다. 앙상한 가지에 추억을 꺼내 걸어봅니다. 


카세트테이프 하나 들어가는 운동화 한 짝 크기의 라디오가 있었습니다. 밤 10시면 '별이 빛나는 밤에'가 시작되고 그 시간에 맞춰 잠잘 준비를 했습니다. 사연 뒤 이어지는 신청곡 중 신곡이라도 나오면 잽싸게 녹음 버튼을 눌러 공테이프에 저장했습니다. 혹여 말소리라도 들어갈까 숨을 죽였던 것 같습니다. 공테이프 하나를 다 채우는 데 며칠이 겁니다. 녹음된 테이프는 낮이고 밤이고 수시로 들었습니다. 그러다 큰형이 고등학교 입학할 때 아버지가 오디오 한 세트를 장만해 주셨습니다. 맨 위에 턴테이블, 그 아래 조작 버튼, 또 그 아래는 더블 데크 카세트, 양 옆으로 스피커가 자리한 제법 근사한 전축이었습니다. 더블데크 카세트는 테이프 복사에 최적화였습니다. 공테이프만 있으면 얼마든 복사가 가능한 신 문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만 모아 제법 근사한 앨범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잡음이 들어가지 않게 녹음하는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저는 텐테이블이 좋았습니다. 바늘 끝이 닿으면 음악이 나오는 게 신기했습니다. 간간이 바늘이 긁히는 소리도 정감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LP판을 사 모았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과 반대 방향의 레코드 가게를 찾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가게 안에 잔뜩 자리한 LP판을 구경하는 재미로 찾았습니다. 돈이 조금 모이면 종로 세운상가를 찾았습니다. 대로변에 나란히 들어선 음반판매점이 있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 크기였지만 다른 곳보다 몇 천원은 싸게 살 수 있었습니다. 차비가 들었지만 차비는 빠질 만큼 저렴했습니다. 모으다 보니 제법 모였습니다. 책이 꽂혀있던 장에 LP판을 채웠습니다. 스크래치라도 날까 애지중지 했습니다. 앨범 안에 든 가사 모음집도 혹여 구겨질까 조심히 다뤘습니다. 안타까운 건 LP판이 습기에 약한 걸 알았지만, 습기가 없는 그런 집에 살지 못했습니다. 처음 쨍쨍하던 가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전투 의지를 상실한 패잔병 같았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면 못 듣는 음악이 없습니다. 음반 매장을 찾아가서 앨범을 고를 일도 없어졌고요. 사놓은 앨범이 상할까 노심초사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 테고요. 그때는 불편하기는 했지만 내 손으로 직접 사고 정을 주고 관리하며 애지중지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때 좋아하던 가수와 노래는 지금 들어도 좋습니다. 또 들을수록 그때의 추억도 다시금 꺼내보게 되고요. 그때 그런 불편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이런 추억을 갖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지금 이렇게 편한 건 훗날 어떤 추억으로 남을지도 궁금합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옛 추억이 더 나는 것 같습니다. 추억과 함께 그때 함께 했던 노래와 가수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이 순간 글로 옮길 추억이 있다는 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나이만 쌓이는 게 아니라 추억도 진해지는가 봅니다. 글로 적는 동안 잠시 과거로 다녀올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입니다. 


2022. 11.2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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