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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24. 2022

누구나 사이보그가 되다

2022. 11. 24.  07:11



《사이보그가 되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2010년, 경비원 ㄱ씨는 아파트 단지 눈을 치우다 넘어져 의족이 파손되었습니다. 그는 15년 넘게 의족을 착용해왔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로 인정해 요양급여 지급 청구를 했습니다. 공단은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업무와 관련하여 부상이나 질병에 걸린 경우로만 한정된다고 지급을 거절했습니다. 이에 ㄱ씨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1,2심 모두 공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법원 역시 공단과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ㄱ씨는 자신의 의족은 신체의 일부분으로 봐야 하고,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건 장애인에 대한 불평등이라는 취지로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대법원은 장애인과 보조기기가 갖는 의미에 대한 깊은 숙고 끝에 1,2심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정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시했습니다.


의족은 단순히 신체를 보조하는 기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다리를 기능적, 물리적,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장치로서, 업무상의 사유로 근로자가 장착한 의족이 파손된 경우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요양급여의 대상인 근로자의 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사이보그가 되다》중 인용)

     

사이보그의 정의는 기술에 의해 개조된 새로운 형태의 인간으로 장기 이식과 약물 주입, 기계와의 결합 등을 통해 극한의 우주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증강된 인간을 의미합니다.(《사이보그가 되다》중) 쉬운 예로 영화 어벤저스의 윈터 솔저 캐릭터나 로보캅을 들 수 있습니다. 손상된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해 상상을 뛰어넘는 힘을 갖게 합니다. 어쩌면 아직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먼 미래의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처럼 특별한 재능은 차치하더라도 장애인의 불편한 신체 기능을 대체하는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공 심장, 인공 고관절, 의족, 인공 와우를 비롯해 색깔을 소리로 바꾸어 색을 구분할 수 있는 기술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히 보조의 개념을 넘어 신체의 일부분으로 인정받는 게 당연시될 것입니다. 앞서 의족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처럼 말이죠. 


반대로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사이보그의 정의가 확장된다면 어떨까요? 개조가 아닌 정상인에게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웨어러블 기기입니다. 스마트워치, VR기기 등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돕는 기기들이 빠르게 발전 중입니다. 입는 컴퓨터, 몸속에 들어간 스마트폰, 뇌에 이식된 인공지능 등 다양한 형태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단순히 보조 기능을 하고 있지만 어떤 형태로 얼마나 발전할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생활 편리를 위해 신체 일부분처럼 활용한다면 굳이 장애인의 보조기구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러한 기기가 생활에 일부분이 되어 있을 겁니다. 이를 통해 몸은 더 건강해질 수 있고, 사람과 연결은 더 쉬워지고, 삶은 더 편리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일상이 된다면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도 허물어지지 않을까요? 굳이 사이보그라고 이름 붙일 필요도 없을 겁니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인간을 이롭게 합니다. 장애로 손 발이 불편한 이들을 돕고 일상을 더욱 편리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정상인과 장애인을 구분 짓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장애인이 불편한 건 몸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대가 변할수록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이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편한 시선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컵에 담긴 물에 먹물을 떨어트리면 서서히 검게 변합니다. 시간이 걸릴 뿐 결국 물은 검게 변합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기준을 제각각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타인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의 극단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학 기술 문화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인간은 비슷한 외형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상인이 생활의 편리를 위해 기술의 도움을 받든, 장애인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기술의 도움을 받든 말입니다. 결국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인간이 겪는 다양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기술 발전을 통해 많은 사람이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더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022. 11. 2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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