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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26. 2022

설치비 15만 원입니다

2022. 11. 26.  06:20


문이 잠겼다. 분명 새로 입력한 번호를 눌렀는데 틀리다는 신호음만 난다. 같은 번호를 두 번, 세 번 눌렀다. 열리지 않는다. 다섯 번 틀렸다는 경고음을 내고 먹통이 되어버렸다. 30초 정도 지나 다시 눌러보니 반응한다. '분명 2688인데 왜 안 열리지.' 손잡이를 아무리 돌려봐도 열릴 기미가 없다. 당연하다. 철문이 쉽게 열리면 철문이 아니다. 내 기억이 잘못될 수 있으니 비슷한 번호로 다시 시도했다. 또 다섯 번 틀렸다. 30초 뒤 다시 시도했다. 2866, 2886, 2668, 2388, 2633 기억나는 대로 다 눌렀지만 번호키는 열리지 않았다. 


전화가 온다. 모르는 번호다. 순간 느낌이 싸하다. '가구 배송 기사'였다. 오전에 매장을 찾아 필요한 가구를 주문했고, 매장 직원은 배송이 밀려 4시쯤 방문할 거라고 했다. 2시도 안 됐는데 오겠다니 미칠 노릇이다. 

"**마켓입니다. 지금 방문해도 될까요? 15분이면 도착합니다."

"아, 그게 오셔도 되긴 하는 데 문이 잠기는 바람에 조금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곳을 먼저 들리면 고객님 계신 곳은 많이 늦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선택이 필요했다. 문은 내 힘으로 열 수 없게 되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왕 열쇠 기사를 부를 거면 가구도 제때 받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두 곳에 전화를 했다.

"지금 바로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열쇠 기사님 불렀으니 아마 비슷하게 도착할 것 같습니다."


가구 배송팀이 먼저 도착했다. 열쇠 기사가 오기 전까지 가구는 2층으로 옮겨졌다. 가구가 복도를 가득 채우자 열쇠 기사도 도착했다. 번호키 앞에 다 모였다. 열쇠 기사는 내가 알고 있는 불러달라고 했고 그 자리에서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 열쇠 기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세팅하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로또 번호 조합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번호로는 절대 못 열어요. 방법은 하나, 부수고 새것으로 다는 겁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헛웃음만 나온다. 문이 잠긴 찰나의 순간을 놓치는 바람에 이런 사단을 만들었다. 지켜보던 배송 기사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생각할 틈도 없이 열쇠 기사는 번호키에 드릴로 구멍을 낸 뒤 그 사이로 잠금장치를 건드려 문을 열었다. 몸통에 구멍이 난 번호키는 그렇게 제 역할을 다 했다. 열쇠 기사는 행동의 주저함이 없었다. 타고 온 차에서 새 제품을 꺼내왔다. 흥정할 겨를도 없이 포장을 뜯고 새 번호키를 달기 시작했다. 당연한 순서다. 새 가구를 들여놓은 사무실을 열어놓고 갈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새 번호키를 다는데 10분도 안 걸린 것 같다. 손이 빠른 기사였다. 제품 사용 설명까지 마친 뒤 출장비는 빼주겠다며 설치비는 15만 원이란다.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진다. 우선 내 돈으로 송금했다. 그 상황에 관리부에 전화해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수도 없었다. 설명한다고 당장 돈을 보내줄 것도 아니니 말이다. 마침 월급날이어서 어제까지 '텅장'이 오늘은 통장이었다. 그 돈이면 둘째 학원비인데.


열쇠 기사를 먼저 보내고 잠시 뒤 가구 배송팀도 제 일을 마쳤다. 책상과 의자, 책장이 놓인 빈 사무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지난 한 시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되짚어봤다. 나는 왜 번호키에 새 번호를 세팅하고 문을 닫았을까? 당연히 열릴 줄 알았는데 번호키는 왜 안 열렸지? 분명 저장한 번호가 맞는데 왜 인식하지 못하지? 생각할수록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누구에게 어떻게 하소연해야 하지. 설명을 한들 믿어줄까?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입장 바꿔 보면 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다. 


억울하지만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했다. 가구를 새로 들이고 인터넷을 설치했다. 이날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는 데 위안을 삼는다. 허무하게 날린 15만 원은 관리이사에게 잘 설명해 돌려받고 싶다. 받을 수 있겠지?


2022. 11. 26.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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