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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03. 2023

새 해 첫 출장, 나 혼자 잔다

2023. 01. 03.  09:39


새해부터 정신 차리라는 지 새벽바람이 매섭다. 지하철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버스를 탔다. 행신동에 내려 택시로 5분이면 행신역에 도착한다. 버스 정거장 주변에 택시가 없을 시간이다. 기대한 게 잘못이다. 서둘러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5분 만에 도착했다. 행신역에 내리니 열차 출발까지 10여분 남았다. 월요일이라 사람이 많은 건가? 목포로 부산으로 출발하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특실로 예약했다. 앞 좌석이 없는 출입문 바로 앞자리다. 짧은 다리지만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다. 낭패였다. 앞 좌석이 없다는 건 노트북을 올려놓는 테이블도 없다는 의미였다. 그걸 몰랐다. 탄식한 들 달라지지 않는다. 방법은 하나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쓰자.

사람의 머리는 위기에 빛을 발한다. 숟가락이 없으면 포크로, 화장실에 휴지가 없으면 신고 있던 양말이라도. 팔걸이에 숨겨진 티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렸다. 허리가 15도 정도 돌아가긴 했지만, 허벅지보다는 나았다. 안정된 자세를 잡고 자판을 두드려 내려간다. 부산까지 3시간. 글 한 편 쓰기에는 충분하다. 빈자리가 많아 오가는 사람도 적다. 헤드폰을 쓰고 화면과 자판에 빠져 바지런히 써 내려간다. 도착 30분 남기고 마무리했다. 오늘도 성공적. 부산 일정도 일부러 여유롭게 잡아놨다. 나의 일정은 아무도 모른다. 정해진 약속 시간에만 맞춰가면 된다. 그전에 이곳저곳 다니며 알아볼 게 있긴 했지만 말이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스타벅스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까지 2시간 여유 있다. 그때까지 또 글을 쓴다. 이번에는 퇴고다. 아메리카노 홀짝이며 원고를 고친다. 새해 첫 출근 치고 상당히 여유로운 시간이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시작부터 호사를 누린다. 굳이 운과 연결 짓자면 올해는 기대하는 일이 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긍정해 본다. 잘돼야 한다. 올해는 작정하고 퇴사에 필요한 고정 매출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준비 중인 프로젝트들은 바람을 안은 돛이 배를 끌고 가듯 순항해야 한다. 마흔일곱을 한 번 더 사는 올해를 반드시 전환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아내 학자금도 갚고, 집 값이 떨어진 이틈에 우리 집도 장만할 테다.


4시간 내리 화면만 봤더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이쯤에서 노트북을 덮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주변 검색 해도 마땅한 곳이 안 나온다. 여기까지 와서 샐러드를 먹자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부산역을 좌측에 두고 걸었다. 주차장 입구 한편에 '정다운 밥상'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입구가 입구 같지 않다. 경계를 풀지 않고 주차장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왼쪽으로 계단실이 나오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입구가 보였다. 11시가 조금 넘었는데 이미 손님이 몇 테이블 있다. 혼자 다니면 잘 먹어야 된다고 엄마와 아내가 늘 말했다. 막상 혼자 다니면 잘 안 챙겨 먹게 된다. 해도 바뀌었으니 말 잘 듣는 아들, 남편이 되야겠다.(그래서 다음 날 점심도 삼계탕을 먹었다) 정식을 시켰다. 잘 찾아온 것 같다. 거짓말 조금 보태 4인 식탁 4/5가 반찬으로 채워졌다. 이걸 혼자 다 먹으라고. 다 먹었다. 밖에서 먹는 새해 첫 끼 치고는 성공적이었다.          

2년 사이 점심을 밥과 반찬으로 배불리 먹은 적이 몇 번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때 늘 걸리는 게 있다. 가족과 함께 먹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5년 전 부산으로 여행 갔었다. 남포동과 해운대 여러 곳을 다녔다. 아이들은 그때 기억이 좋았는지 또 가고 싶다고 가끔 말한다. 기회가 되면 안 가본 곳으로 다시 한번 가자고 말했었다. 이렇게 혼자 다니니 약속이 생각난다. 맛있는 걸 혼자 먹고 나니 꼭 다시 데리고 오고 싶다. 채운 배를 소화시키기 위해 오늘 일정을 소화한다. 몸은 에너지가 넘치는 데 의욕은 글쎄다. 네댓 시간이면 할 일은 끝난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봤지만 딱히 답이 없다. 어디를 간들 신이 날까 싶다. 기껏 남포동 명물 씨앗 호떡 하나 먹었다. 그것도 5년 전 가족 여행 중 처음 먹어본 곳에서 다시 사 먹었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인지, 물가가 올라서인지, 내 입이 커져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그 때깔과 크기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그때 그대로인데 내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착각한 것일 수 있다.

평일 오후 남포동은 한가했다. 폐업한 매장도 다섯 집 건너 하나인 듯 싶다. 겨울, 코로나, 고물가, 고금리 복합 폭탄을 피하지 못한 여러 자영업자가 피눈물 흘리며 그곳을 떠난 것 같다. 사람으로 북적여야 활기도 넘친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한적해진 탓에 의욕도 같이 꺾인 것 같다. 그래서 샐러드 한 팩 사들고 정해놓은 숙소를 찾았다. 퇴근 시간 맞춰 숙박비를 결제하고 빈 방에 들어갔다. 혼자 자는 건 2년 전 대구 출장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잘 차려진 뷔페 음식을 먹기 위해 벨트를 풀 듯할 일은 미뤄두고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몸도 마음도 편히 남은 시간 보냈으면 좋았으련만, 저녁으로 먹은 샐러드 때문인지 밤 사이 변기 위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혼자 있으면 빨빨거리며 잘 다녔다. 이제는 돌아다니는 게 귀찮다. 혼자는 더 다니기 싫다. 두 딸도 제법 자라서 함께 다니는 게 재미있다. 많이 다니는 건 아니지만 가까운 곳을 가도 어릴 때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 아이들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아지는 것 같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다. 가까운 곳부터 비행기 타고 가는 먼 나라까지. 아내와 두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도 여행은 다닐 수 있다. 의지만 있으면 말이다. 서로 바빠서 시간을 못 맞추니 말뿐이 약속만 하는 것 같다. 정작 돈과 시간이 많을 땐 두 딸이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핑계대신 행동부터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올해는 한 번이라도 더, 가까운 곳이라도 꼭 다닐 수 있게 실천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올 한 해동안 해야 할 게 다양하다. 돈도 벌고, 강의도 하고, 여행도 가고, 책도 쓰고 직장도 다니고. 바빠도 가족과 약속을 먼저 지키는 아빠, 남편이 되어야겠다. 하룻밤 사이 많은 생각을 했네. 이제 돌아가는 열차 타러 가야겠다.  


2023. 01. 0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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