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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뺄수록 담백해지는 직장생활

by 김형준

2023. 01. 07. 15:25


요즘 잠잠하다 했다. 이틀 동안 출장을 다녀와서 한 주가 금방 간 것 같아 기분 좋은 금요일 아침이었다. 퇴근도 1시간 당겨져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틀 동안 부산 출장을 다녀온 상무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에 한숨부터 나왔다.

"기껏 뽑아놨더니 서류도 못 만들고 측량도 못한단다. 공사 시작하라고 난리니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보는 앞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그 정도는 이해하는 사이다. 상무님도 미안한 눈치다. 미안해도 어쩔 수 없다. 새 사람을 뽑으면서 검증을 안 한 건 그분 잘못이다. 추천한 사람의 말만 믿고 꼼꼼하게 안 챙긴 탓에 내가 덤터기를 쓰게 생겼다. 현장 개설에 필요한 서류 작성은 현장에서 해왔고 그럴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뽑는 게 당연하다. 본사 직원이 현장 업무를 지원하게 되면 과하게 표현하자면 앞으로 벌어 뒤로 까지는 꼴이다.

나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한다.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사람인지라 잘 안된다. 상대방도 내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느낄 만큼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때로는 일부러 그러기도 한다. 그래야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느낄 테니 말이다. 월급쟁이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숨긴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때로는 꿈틀대야 살아있는 줄 안다. 월급에 다 포함되어 있으니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의 문화는 옛말이다. 한때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또 그렇게 해왔다. 세대가 변하고 사람도 변하면서 나도 변했다.


끓어오르는 대로 터트린들 바뀔 건 없다. 화내는 동안 내 기분만 더 안 좋아질 뿐이다. 심호흡을 해본다. 딴생각도 해본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하나다. 시킨 일을 마무리해야 그 일이 끝난다는 것이다. 피한다고 없어질 일이 아니다. 죽상을 하고 있어도 지시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입으로 구시렁대도 손으로는 그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일이 한 번씩 있을 때면 이 회사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된다. 존재의 의미까지 생각하면 너무 간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나는 심각하다. 한두 번 이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장에 비해 직원이 적다. 일 년 내내 채용 공고를 올려놓지만 회사 입맛에 맞는 지원자가 없다. 운이 좋아 입사일까지 정해도 출근 당일 연락이 끊기거나 중간에 다른 곳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연락을 주는 예의 바른 지원자도 있기도 했다. 사람이 안 뽑히는 건 냉정히 말해 매력이 없는 회사로 보이게 만든 회사 잘못이다. 규모가 작아도 연봉을 많이 주거나 복지가 다양하면 누가 안 오겠는가. 나를 포함해 직원 대부분 적지 않은 불만이 쌓여 있다. 노조가 없어 다행이지 파업 여러 번 했을 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저기 땜빵식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때마다 아무 말 못 하는 나도 문제이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가 더 불만이었다. 월급은 받아야 하니 까라면 깠다. 이제는 내 일만 하고 싶다고 에둘러 표현도 했고 어림짐작으로 이해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먼저 상의할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의 지시는 적잖이 언짢았다. 그래서 더 크게 한숨을 쉬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다고, 상무님 덕분에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또 하게 되었다고.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문제가 된 현장 담당자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이미 내 도움이 당연한 듯 대놓고 자료를 보내겠다고 한다. 언뜻 미안해하는 듯한 말투는 유리에 입김 사라지는 속도보다 빨랐다. 나도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대신 선은 확실히 긋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담당자가 해야 하는 걸 분명히 요구했다. 안 해도 되는 일까지 떠안고 싶지 않았다. AI음성처럼 말했다. 그렇게 안 들렸을 수도 있다.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라도 말해야 상대방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또 미안해야 하고 본인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 하다 보면 별별 일 다 겪는다. 원하든 원치 안 든 시키는 일은 다 하는 게 월급쟁이 숙명이다. 그게 싫으면 직장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싫어도 월급 때문에 버틴다. 못마땅해도 가족 때문에 참는다. 참고 넘기면 다시 좋은 때가 올 거로 믿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낙타등 같은 그래프를 그리며 사는 게 월급 쟁이니까. 그럴 때 감정은 고이 접어 속주머니에 담아두어야 한다. 감정이 나대게 놔두면 서로가 불편해지는 일이 생긴다. 차칫 통제하지 못하면 직장을 뛰쳐나가는 불상사도 생긴다. 두어 번 해보니 도저히 할 짓이 아니더라. 홧김에 사표 던지는 건 볼펜으로 허벅지 찔러서라도 참아야 한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하면 본인은 물론 가족, 직장 상사, 친구, 사돈에 팔촌까지 눈총 받을 수도 있다.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더라. 그러니 직장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는 감정을 빼고 대하는 태도가 자신의 건강은 물론 가정을 지키는 현명한 처세라 생각한다.


2023. 01. 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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