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1. 08. 07:50
2세기 경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천동설이 만들어졌다. 이후 15세기가 되어서야 코페니르쿠스에 의해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이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 최초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1968년 제기된 난제 '리드 추측'을 50여 년 만에 증명해 냈다. 정의나 가설이 만들어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대로 기존 정의가 부정되고 가설이 입증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는 한 번 정의되면 그만큼 부정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405일째 금주를 이어오고 있다. 나는 술을 못 끊을 줄 알았다. 안 될 줄 알고 시도조차 안 했었다. 술을 끊고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아니었다.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은 다짐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술을 마시지 말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의지를 다지기보다 그냥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시작은 했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걱정됐다. 그러면 안 된다고, 적어도 너는 그러면 안 된다고 회유하는 이도 있었다. 못내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는 친구도 있었다. 못마땅해하는 상사는 수시로 눈치를 줬다. 여러 번 비슷한 상황에서 나를 변론해야 했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술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했었다.
그렇게 정의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2018년 1월 1일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는 시간이 쌓일수록 늘 술이 걸림돌이었다. 그 사이 코로나도 겪으며 사람 만날 기회가 줄었고 술자리도 줄었다. 자연히 술 마시는 횟수와 양도 줄었다. 가끔 집에서 아내와 맥주 한 두 캔, 소주 한 병이 전부였다. 어느 때부터는 적은 양을 마셔도 다음 날 일어나기 힘들었다. 전날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아침에는 반드시 책 읽고 글을 써야 했다. 그러니 다음 날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다. 그런 날이 쌓일수록 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끊는 게 옳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를 다시 정의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다.
나를 정의하고부터 정의한 대로 행동했다. 술을 권하는 동료에게 당당하게 말했고, 술을 당연하게 마셔야 되는 자리도 피하지 않고 나갔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술 안 마셔서 만나기 불편하면 안 만나면 그만이다. 지금은 익숙하게 말 하지만 초기에는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숨길 일은 아니었지만, 어렵게 말을 꺼내면 안 믿는 눈치였다. 그럴 때면 속에서는 '이번 한 번만 마실까'라는 마음도 생겼지만 눈 한 번 질끈 감고 그 상황을 넘겼다. 집에서도 유혹은 계속됐다. 내가 술을 끊었다고 아내까지 끊으라고 못했다. 끊을 마음도 없단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 힘들고 지칠 때면 한 잔씩 마시곤 했다. 그 옆에서 멀뚱이 지켜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가끔 무알콜 맥주로 분위기 맞춘다) 손만 뻗어 같이 한 잔 마시면 아내에게 도움이 됐을 수 있다. 여러 번 유혹을 느꼈지만 결국 참아냈고, 스스로 정의한 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고 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연출한 신원호 피디는 조정석이 연기한 '익준'은 가볍고 까불기만 하는 캐릭터가 아니라고 했다. 여기저기 참견하고 장난치고 유쾌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자존감이 높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을 정의한 것이다. 나도 내가 나를 아끼기 시작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술자리가 아니어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에 굳이 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성을 걱정하는 이들은 한두 잔 정도는 마셔야 하지 않냐고 충고해 준다. 그들의 충고는 감사히 듣는다. 다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다. 술자리는 특히 첫 잔을 시작으로 결국에는 사단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를 잘 알기에 당분간은 입에 안 대겠다고 나를 정의했다.
오늘까지 405일째 술을 끊을지 나도 몰랐다. 시작할 땐 끊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을 뿐이다. 한 주 한 달 육 개월 지나면서 술을 안 마셔 좋은 점이 피부에 와닿았다. 매일 같은 시간 일어나는 게 덜 힘들고, 술과 안주로 속이 부대낄 일이 없었다. 늘 맑은 정신으로 새벽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여전히 순항해 올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선택했다. 술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기쁨을 포기하고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써 매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시작하는 것을 말이다. 아직까지는 옳다고 믿고 이 생활에 중독되어 가는 중이다. 어쩌면 더 나이가 먹거나 내 상황이 달라진다면 다시 술을 마실 수도 있다. 다시 마시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한다. 생각 같아서는 그때가 아주 늦게 천천히 왔으면 한다. 여전히 직장을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요즘 술을 마시지 않은 덕분에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로 정의하면서 주변에 굴하지 않은 나를 칭찬한다. 저마다 사정과 상황이 있다 보니 무턱대고 술을 끊으라고는 못하겠다. 다만 생각이 있다면 내가 했던 방법대로 시도해 보길 추천한다. 모든 건 마음먹기 달렸으니 말이다.
2023. 01. 08.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