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1. 12. 07:37
지금 다니는 직장이 좋은 점 한 가지는 동절기 퇴근 시간입니다. 해가 짧아져 어두울 때 퇴근하는 여직원이 안쓰러웠던 사장님의 결단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2월 말까지 5시에 퇴근합니다. 학원 다니는 두 딸보다 일찍 집에 도착합니다. 헬스장에서 2시간 운동하고 와도 8시면 저녁을 먹을 수 있습니다. 매주 수, 목 9시는 수업을 듣습니다. 6시 퇴근할 때는 운동은 엄두도 못 내고, 저녁 먹고 설거지하기도 빠듯했습니다. 반대로 시간 여유가 생기니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퇴근길에 큰딸을 태우고 오지 못했던 게 이빨에 낀 고기 같았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마치고 작정하고 마중 가겠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당연히 수업 중이라 답은 없었고 기다리면 제시간에 나올 거로 기대하고 출발했습니다.
샤워를 해도 목 뒤 땀이 찔끔찔끔 솟습니다. 패딩이 거추장스럽고 땀이 묻을까 차에 타 벗었습니다. 영상 기온이라 춥지 않았습니다. 엊그제 태우고 오지 못한 아쉬움을 만회할 기회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갑니다. 학원 앞에 차를 대니 수업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재시험에 걸리지 않길 바라며 기다렸습니다. 매 수업마다 쪽지 시험을 보고 몇 개 이상 틀리면 남아서 재 시험을 보게 합니다. 당연히 시험을 잘 보면 재시간에 끝나는 것이고요. 시간 맞춰 나와주면 나도 딸도 해피한 퇴근길이 될 것 같았습니다. 10분이 지났습니다. 재시험에 걸렸구나 짐작합니다. 희망은 희망으로 접어둡니다. 때에 따라 일찍 나오기도 해서 다시 기대를 걸어봅니다. 또다시 10분이 지났습니다.
20분이 지나면서 스멀스멀 탓을 하게 됩니다. '9시 수업에 참석하려면 조금이라도 일찍 가야 하는데 재시험은 왜 걸려가지고'.
탓하는 제가 한심합니다. 내가 원해서 갔습니다. 내 기분 좋자고 먼저 가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딸이 늦어도 탓하면 안 됐습니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기다렸습니다. 그 사이 10분이 또 지났습니다. 30분이 넘어가자 이제는 혹시 먼저 간 거 아니야, 집에서 딴짓하느라 문자온 걸 못 봤나? 나오길이 엇갈려 벌써 집에 간 건 아니겠지? 큰딸이 왔는지 아내에게 카톡을 보내도 답이 없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별 생각을 다 합니다. 먼저 갔으면 기다린 시간은 뭐가 되지? 안 기다리고 갔으면 벌써 밥 먹고 수업 들을 준비를 마쳤을 시간인데.......
다시 심호흡합니다. 이런들 저런들 내가 원해서 간 겁니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입니다. 데리고 가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40여 분 만에 큰딸이 나옵니다. 혼자 쌩쑈한 저를 알 리 없는 큰딸은 당연하게 차에 탑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난주 내준 숙제를 안 해간 걸 들켰고 다 하고 오느라 늦었답니다. "그랬구나." 웃으면 맞장구칩니다. 따지고 든들 달라질 게 없습니다. 자기 입으로 앞으로 숙제는 꼭 해가야겠다고 말하니 더 말해 뭐 할까요. 방학인 요즘 낮동안 뭐 하고 지내는지 말해줍니다. 낮에는 친구 생일이서 피자로 점심을 먹었답니다. 주변에 딱히 갈 곳이 없어서 우리 집에 친구를 데리고 왔답니다. "네 방은 치웠겠지?" 아니나 다를까, 친구를 30여 분 밖에 세워두고 부리나케 치웠답니다. 옳다구나 싶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친구 데리고 오는 것도 괜찮겠다." 대화 몇 마디 나누니 집에 도착했습니다. 기다리며 들었던 감정은 이미 오간데 없었습니다.
알파벳 'W'처럼 감정이 요동쳤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말이죠. 사람인지라 상대를 탓하기도 했습니다. 탓해도 달라질 건 없는데 말이죠. 그래도 하나 얻은 게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 감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성질내고 말았을 겁니다. 기다리는 내내 투덜댔을 겁니다. 내가 어떤 감정인지 알아채지도 못하면서요.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을 드론을 띄워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 상황이, 감정이 별개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감정을 통제하기보다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 아빠여서 감정을 완벽하게 조절해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어른이라고 감정을 속일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주는 게 오히려 나 다운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덕분에 큰딸과 사이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2023. 01. 12. 0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