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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pr 04. 2023

보이스 피싱과 글쓰기


대출을 받기까지 1주일 걸렸다. 돈이 통장에 들어오고 은행 직원이 알려준 계좌로 이체했다. 1분 뒤 15**으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여서 경계심이 들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여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신 버튼을 눌렀다. 중년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ㅇㅇ님이시죠? 여기는 K은행 금융 감시팀입니다. 좀 전에 황##님 계좌로 7백만 원 송금하셨죠? 이전에 전혀 거래 내역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보내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구체적으로 물어오는 바람에 대답을 못했다. 어물쩍 둘러대려고 하니 상대방은 더 강한 어투로 말한다.

"아마도 지금 보이스 피싱에 걸려 돈을 보내신 거로 추측됩니다. 이 전화 끊으시면 바로 해당 은행 콜센터로 전화하셔서 이용 중인 계좌 거래 중지 신청하세요."

정신이 들었다. 지난 1주일 동안 누구와 통화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처음 시작은 한 통의 문자였다. 대출이 필요했던 당시 빛과 같은 내용이었다. 문자에 적힌 번호로 전화했다. K 은행 H 직원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대출이 필요한 이유와 금액을 말했다. 여기저기 조회를 해보더니 남아 있는 대출을 먼저 정리하면 원하는 금액만큼 실행이 가능하다고 알려줬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며 안도했다. 필요한 서류를 알려줬고 준비하는 동안 여러 차례 통화했다. 처음은 여직원, 그다음 남자가 번갈아 받았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주일 동안 여러 번 통화했고, 여직원은 내 사정에 공감하는 멘트를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그 말에 아마도 나는 의심과 경계를 풀었던 것 같다.

며칠 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피해자 신분으로 진술이 필요하니 출석하라고 했다. 이미 나와 같은 피해자가 여럿 있는 사건이었다. 이미 상대가 특정된 상태여서 질문이 많지 않았다. 20여 분 조사를 받고 나왔다. 다행히 일찍 거래 중지 신청을 해서 돈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다만 은행 행정 절차로 돌려받기까지 몇 달이 걸릴 수 있단다. 그나마 원금을 갚을 때까지 이자만 부담하면 됐다.




2018년 있었던 일입니다. 스마트한 은행 전산망 덕분에 대출 원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은행 시스템이 이만큼 뛰어난 걸 그때 실감했습니다. 운은 좋았지만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보이스 피싱 때문에 받은 상처가 아닙니다. 대출받아야 할 만큼 절실한 게 그때 있었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한 즈음이었습니다. 책 100권을 읽고 나니 글쓰기에도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을 써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때는 내 수준이 어떤지 몰랐습니다. 그저 글만 쓰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시작은 했지만 생각만큼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책 쓰기 강사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요. 신중하게 찾아볼 생각 못 했습니다. 이미 글을 써야겠다는 의지는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누군가 기름을 부어주길 바랐고, 아무나 걸리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강사가 있었습니다. 경력도 화려했고 수강생의 성공기도 넘쳤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특강을 들으러 갔습니다. 선택받은 자 만이 들을 수 있는 수업인 양 신청부터 은밀했습니다. 4시간 특강에 15만 원을 내라고 합니다. 겨우 한자리 마련했다며 생색도 냅니다. 마치 저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습니다. 덧붙여 강의 중간 1:1 상담을 진행할 테니 간단히 설문을 작성하라 했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중에 알았습니다.


4시간이 순식간에 지났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성공을 확신하는 메시지로 가득했습니다. 자연히 저도 빠져들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내 책이 뚝딱 나올 것 같았습니다. 책을 내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여러 사례자가 증명해 주었습니다. 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믿음 하나로 강의를 신청했습니다.


시작은 순조로웠습니다. 먼저 작성한 설문과 간단한 상담, 그리고 이어진 원 데이 특강. 8시간 수업을 듣고 목차를 손에 쥐었습니다. 목차를 받으니 이미 책 한 권 다 쓴 것 같았습니다. 든든했습니다. 희망이 보였습니다. 받은 목차대로 한 꼭지 씩 썼습니다. 처음 한 꼭지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내용이 나쁘지 않다며 몇 가지 수정 사항을 체크해 줬습니다. 응원과 조언을 듣고 다음 꼭지도 썼습니다. 두어 번 피드백을 받고 나니 문제점을 지적해 줍니다. 이것만 고치면 글이 더 좋아질 수 있다며 추가 코칭을 제안합니다. 맞습니다. 추가 코칭을 받기 위해 대출을 받았던 겁니다.


코칭 과정은 이미 신청했습니다. 정해진 날짜에 입금만 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보이스 피싱으로 돈을 못 구했고 결국 입금도 못했습니다. 입금하기로 한 날 쪽팔려서 전화는 못 하고 문자로 사정 설명했습니다. 곧바로 대답이 왔습니다. 건승을 바란다는 몇 글자였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착각으로 시작했던 글쓰기.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오기가 생겼습니다. 오기 때문에 더 잘 쓰고 싶은 간절함을 가졌습니다. 간절함이 생기니 우선순위도 달라졌습니다. 책을 읽기 위해 잠을 줄였고, 책 읽는 시간을 쪼개 글을 썼습니다. 5년째 같은 일상을 반복해 왔습니다.


그 사이 종이책과 전자책 6권을 썼습니다. 그리고 개인 저서로 3권의 초고를 집필해 놨습니다. 여전히 직장을 다니면서 말이죠. 그때 만약 상처와 착각을 핑계로 글쓰기를 포기했다면 아마 더 암울한 시기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았습니다. 빈 화면을 매일 마주했습니다. 오로지 글로 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말이죠.


5년의 기록이 저를 증명해 줍니다. 제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글이 설명해 줍니다. 누구보다 간절했고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글쓰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글을 쓴 덕분에 좌절 대신 희망을 선택했고 이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은 희망은 전하려고 합니다.


글쓰기, 책 쓰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자기 이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 잘하고 못하는 게 무엇인지, 성격의 장단점, 실패와 성공 경험 등 과거는 물론 미래의 나까지 들여다보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글을 쓰면서 말이죠.


이 글을 쓰기까지 5년 걸렸습니다. 그동안 망설였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드러내는 게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글로 드러내기까지 저 스스로 단단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덕 악착같이 썼던 것 같습니다. 실수에 실패에 더 당당해지기 위해서 말이죠.


우리는 드러내지 않지만 저마다 실수, 실패가 있기 마련입니다. 숨기고 싶고 창피할 것입니다. 실패가 없는 삶은 도전하지 않은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저 무리 속에 섞여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하게 보내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과연 자신을 위한 것일까요? 실패를 통해서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패에 당당해질 수 있다면요.


도전을 해야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가 생깁니다. 성공은 그 자체로 값진 경험입니다. 반대로 실패에도 당당해지고 배우려고 할 때 더 가치 있는 경험이 됩니다. 저마다의 값진 실패의 경험을 우리는 책을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수단이 있지만 저는 단연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 갖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챗 GPT가 원하는 글은 써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 안에 담긴 감성까지 표현하지 못합니다. 챗 GPT가 그럴듯한 기획서는 써줄 수 있지만 실패했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감정 생각 경험을 풀어내는 글이 최고의 글이라고 자신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저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쓸 것입니다. '누구처럼' 쓰지 않고 '나답게' 쓸 것입니다. 제가 가진 경험은 저만이 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실패했던 경험이든 성공했던 과정이든 말이죠. 5년을 묵힌 이야기를 1시간 반 동안 풀어냈습니다. 진작에 썼으면 그동안 더 가벼웠을 텐데요.


아직 꺼내지 못한 돌덩어리가 제법 있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가볍게 꺼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러라고 놔둘 겁니다. 저는 제 인생을 살면 그만입니다. 잘나든 못나든 제 이야기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기꺼이 꺼내놓을 것입니다. 그게 '나답게' 사는 거라 믿으니까요.





https://blog.naver.com/motifree33/223040680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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