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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pr 19. 2023

글로 쓰는 후회의 재발견 -<후회의 재발견>다니엘 핑크


어느 해 12월 30일, 버스는 이미 운행을 마쳤다. 집에 가려면 한강대교를 건너야 했다. 택시비 낼 돈도 없었다. 걷기 시작했다. 다리 위로 접어들었다. 사람 없는 게 당연한 시간에 사람이 보였다. 마주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을 가리기 위해 풍성한 털로 덮인 코트를 걸친 것 같았다. 이 시간에 한강대교를 혼자 걷는 여자라니.

가뜩이나 얇은 외투 탓에 몸은 더 움츠려 들었다. 집까지는 1시간을 더 걸어야 될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봤다. 인도를 걷고 있을 거로 짐작했던 그 여자는 인도에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외투 탓에 어디에 있는지 가늠이 안 됐다. 짐작하지 못한 곳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난간대에 걸터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가던 길을 갈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었다. 잰걸음으로 그 여자 있는 난간대를 향했다. 손을 뻗어 팔을 잡았다. 저항하지 않는다. 대신 엉덩이를 난간에서 뗀다. 난간대 밖에 강을 향해 두 발로 섰고 그 여자의 한쪽 팔을 잡았다. 내 손이 그 여자의 팔을 놓으면 다리 아래로 떨어질 상황이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꿈쩍하지 않는다. 어디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저항도 안 한다. 죽을 작정 했다면 손을 뿌리쳤을 텐데 그러지도 않는다. 그 덕에 미끄러운 털 코트를 놓치지 않았다. 수십 초였지만 수십 분이 흐른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오던 방향에서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빨리 와달라고 소리쳤다. 지나는 차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혔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거리가 좁혀지고 나서야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나 보다. 그제야 달려와 그 여자의 남은 한 팔을 잡았다.


그 남자는 별말 없이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나도 내 갈 길 가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 그 여자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는 몸을 부축해 한강대교 중간에 위치한 검문소로 향했다. 야간 근무 중이던 군인의 반응은 사무적이었다. 자주 있는 일인 듯 몇 가지 질문 후 나는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몸을 녹일 새도 없이 다시 강바람과 마주했다. 겉옷을 아무리 움켜쥐어도 찬 기운은 몸으로 파고들었다. 날 선 새벽 공기는 방금 전까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일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아마도 20년은 더 지난 일인 것 같다. 그때 만약 그 여자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 여자도 잠시 후 제 갈 길 갔을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구도 보지 못한 채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아닌 누군가 그 여자를 구했을 수도 있다. 그 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떤 각오나 의무 때문에 그 여자에게 돌아갔던 건 아닌 것 같다. 그 순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될 것 같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때 겪었던 일이 벌어질 거였다면 아마 되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칫 내 실수로 내 눈앞에서 끔찍한 일이라도 벌어졌다면 아마도 지금과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들은 대부분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후회한다고 한다. 후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후회로 남는다. 그렇다고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가 안 남는 것도 아니다. 모든 선택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후회는 남기 마련이다.


선택을 했든 안 했든 후회에서 가벼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1단계. 자기 노출 : 드러내고 덜어내기

후회에 대해 글을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후회를 털어놓으면 그 경험은 감정의 영역에서 인지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언어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불쾌한 감정을 그물에 가두어 고정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해 준다.


2단계. 자기 연민 : 정상화하고 중화하기

자기 연민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후회를 포용하도록 유도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기꺼이 자신의 후회를 곁에 두려는 의지는 개인의 발전을 위한 길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3단계. 자기 거리 두기 : 분석하고 전략 짜기

자기 거리 두기를 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이야기하는데 집중하기보다 경험을 재구성하여 통찰을 얻고 마음을 정리하는 데 더 집중한다. 자꾸 곱씹는 몰입 행위에서 벗어나 좀 더그레를 두고 재구성하는 행동으로 옮겨감으로써 감정이 통제되고 행동의 방향이 변한다. 결과적으로, 자기 거리 두기는 사고력을 강화하고,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키며, 지혜를 심화시키고,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높아지곤 하는 혈압을 낮춰준다.

출처-《후회의 재발견》다니엘 핑크


지금 이렇게 글로 쓸 수 있다는 건 그때 그 여자를 구했기(결과만 놓고 보면) 때문일 수 있다. 다행히 내 선택이 옳았고 내 수고 덕분에 누군지 모를 여자의 목숨을 구했다. 반대로 그와 같은 선택을 안 했다면 온갖 상상이 지금까지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 부정적인 결말일 테고.


저마다 다른 사례와 경험이 있을 것 같다. 그때 자신이 의지한 대로 선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사는 내내 마음의 짐을 갖고 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도움이 될 3단계를 앞에 적었다. 제일 먼저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글로 표현해 내는 드러내고 덜어내는 과정이다. 경험을 인지의 영역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러고 나면 무엇이 문제 인지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문제가 보이면 답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 연민 즉, 자신을 정상화하고 중화하는 단계이다.

자기 안에 있던 일을 꺼내놓음으로써 거리를 만들게 된다. 내가 나를 떨어져서 보면 객관화시킬 수 있다. 객관화는 나를 통제할 수 있는 단계에 데려다 놓는다. 통제는 나를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신이 겪은 후회의 감정과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어쩌면 사람들은 1단계에서조차 망설이게 된다. 과거의 일을 꺼내놓는 게 시작이지만 그만큼 힘이 든 건 사실이다. 글로 풀어내보라고 쉽게 권유하지만 당사자는 망설여진다. 후회의 순간과 쉽게 마주할 수 있다면 반대로 후회가 남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는 내내 그 일에 갇혀 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털어내는 게 필요하다. 그 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더더욱 필요하다.


용기는 후회를 바로잡는 출발점이다. 후회로 남은 그 순간도 어쩌면 용기를 못 냈기에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할걸,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할걸,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할걸, 해야 할 일 대신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걸. 원하는 게 있었지만 용기가 부족했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후회의 감정에서는 자유로워질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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