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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pr 22. 2023

부고, 동창 모임 있는 날


고등학교 졸업 이듬해부터 동창회장을 맡았다. 회장은 친구들이 붙여준 직함이고 하는 일은 총무나 다름없다. 매년 최소 한 번 이상 모임 자리를 만들었다. 장소와 시간을 정해 통보한다. 몇 명이 나오든 상관하지 않는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만남을 갖는다. n 차로 이어지는 술자리 장소 섭외와 술값 계산, 술 취한 친구 귀가까지 책임지는 게 내 역할이었다. 작년까지 27년째 해 왔다.


얼마 전부터 이런 수고 없이도 모이게 되었다. 우리는 이틀 밤만 자고 나면 50이다. 이맘때면 우리 부모님들 한 분씩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시기이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부고를 알리는 친구가 늘고 있다. 부고는 다른 형태의 동창 모임 공지가 되었다. 장소와 시간은 정해졌고 저마다 사정에 따라 참석 여부만 결정하면 된다.

어제도 한 친구가 아버지 부고 소식을 알려왔다. 단톡방에 소식을 전하면 몇몇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날 시간을 정하기도 한다. 발인까지 대개 이틀이 주어진다. 그 사이 첫날 참석하는 친구 이튿날 조문하는 친구로 나뉜다. 대개는 발인 전날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10여 명이 모이면 장소만 다를 뿐 동창 모임과 다를 게 없다.


동창이 좋은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27년 동안 매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사는 모습을 들여다봐왔다. 20대의 방황, 30대의 치열함, 40대의 불안을 함께 해온 자체로 위로고 위안이었다. 어색해할 사이 없이 어느새 열일곱을 시작으로 마흔일곱까지 시간을 아우르며 추억을 꺼내놓는다. 각자 하는 일이 달라 고민 걱정은 제각각이지만, 열일곱부터 함께 한 추억만큼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하나로 이어준다.


장례식장이어서 차분한 분위에서 꼭 필요한 대화만 주고받게 되는 것 같다. 직장인은 은퇴에 대한 고민, 자영업자는 매출 걱정, 사춘기 자녀와 갈등, 직장 안에서의 문제 등 너 나 할 것 없이 겪는 공통의 주제가 이어진다. 밤을 새워 대화해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들이다. 굳이 답을 찾겠다고 하는 대화도 아닐 테다. 어디서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지만, 적어도 내 앞에 친구와는 속 터놓고 할 수 있는 사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함께해 온 시간의 힘이 아닐까 싶다.


열일곱, 철이 덜 든 그때 만나 30년 동안 알아왔다. 각자의 속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곁에서 지켜봐 왔다. 자기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친구 없었고, 남 잘 되는 꼴 못 보고 험담하는 친구도 없었다. 30년을 한결같이 지냈던 것 같다. 열일곱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지금도 계산기보다 우정이 먼저인 친구들이다. 목숨을 내어줄 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무런 조건 없이 울고 웃어줄 친구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의미하는 벗 '友'는 한자 또 우'又'가 나란히 그려진 모습이라고 한다. 이는 친한 친구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손을 맞잡는 건 그만큼 서로를 신뢰한다는 의미일 테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긴 시간 서로의 삶을 바라보고 대화하고 걱정하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동안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감정일 것이다. 신뢰로 만들어진 30년 우정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퇴적층만큼이나 견고하게 이어지길 바란다.




https://blog.naver.com/motifree33/22307671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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