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Apr 23. 2023

삼겹살과 비빔면, 이 보다 좋은 순 없다


토요일에도 대학원 과제 때문에 학교를 간다는 아내. 놀이치료 과정 실습을 위해 둘째 딸 친구의 동생 영주도 데려간다니 기꺼이 운전수가 되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서울로 나가는 도로는 언제 어디서 정체가 있을지 모른다. 30분 일찍 출발했다. 도로는 한산했다. 학교에 40분 일찍 도착했다. 아내와 영주는 학교 앞 롯데리아로, 나는 혼자 있을 곳을 찾았다.


커피 전문점에 자리를 잡았다. 대학교 앞이라 주말에도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했다. 집중이 필요할 때의 조합이다. 노트북을 켜고 특강 PPT 파일을 열었다. 손댈 곳이 여전히 많다. 수정을 해도 그다지 나아지지는 않는다. 내용이 중요할 테다. 1시간 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끝났단다. 내려준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몇 주 동안 준비한 과제를 끝낸 탓에 마음이 홀가분한가 보다. 맛있는 게 먹고 싶단다. 시계를 보니 식당들 브레이크 타임이다. 두 딸은 학원으로 친구 만나러 나가고 없다. 배달 음식도 그저랬다. 전날 먹고 남은 삼겹살과 비빔면을 먹기로 했다. 아내는 삼겹살을 굽고 나는 비빔면을 끓였다.


삼겹살을 굽기 전 한 입 길이로 부추와 양파를 썰어 양념장에 묻혔다. 정육점에서 준 파채도 잘 씻어 물기를 빼고 양념을 둘렀다. 김치냉장고에서 3년째 숙성 중인 묵은지도 꺼냈다. 프라이팬에 올린 삼겹살에서 기름이 나오면 묵은지가 올라간다. 고깃기름과 묵은지가 만나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맛과 향이 난다. 신맛은 잡아주고 아삭한 식감과 기름의 고소함만 남는다. 묵은지를 김치냉장고 깊숙한 곳에 묵혀두는 건 이 순간을 위해서다.


고기와 묵은지가 다 익어갈 즈음 비빔면을 끓일 냄비를 올린다. 비빔면의 맛을 좌우하는 건 면발의 쫄깃한 식감이다. 이는 헹구는 과정에 좌우된다. 수년간 비빔면을 먹으며 얻는 결괏값이다. 정수기 냉수에 얼음 몇 알을 띄워놓는다. 잘 익은 면을 흐르는 물에 씻어낸 다음 준비한 얼음 물에 입수시킨다. 찬물에 처음 들어갈 때 몸이 움츠려드는 것과 같은 원리다. 면발도 얼음 물을 만나면 본래의 탱탱함을 되찾는다. 그 상태에서 건져내 비빔장과 장모님이 보내준 중국산 깨로 짠 참기름과 버무려주면 극강의 비빔면이 된다. 이렇게 완성된 면은 마지막 면발까지 탱글하고 쫄깃함을 유지한다.


식탁 한가운데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과 묵은지 접시가, 그 옆으로 좌 부추 우 파채, 또 그 옆에 비빔면과 흰쌀밥 한 공기 그리고 앞 접시가 하나씩 놓였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한 가지, 아내는 맥주 나는 무알코올 맥주. 30여 분 만에 먹음직스러운 한 상이 차려졌다. 한고비 넘긴 과제를 축하하며 펼쳐놓은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했다. 비빔면 위에 삼겹살, 이 조합 말해 뭐 할까. 여기에 부추와 삼겹살, 파채와 삼겹살, 기름에 구운 묵은지와 삼겹살, 침이 고인다. 젓가락 들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 한 번 시작된 젓가락질은 멈추지 못한다. 눈앞 음식에 이미 이성은 마비다. 본능에 따라 젓가락질할 뿐이다. 눈에 띄게 줄어든 음식이 눈에 들어올 즈음 뱃속에서도 신호를 보낸다. 그제야 이성도 슬금슬금 되돌아온다. 그래도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한 젓가락 더 욱여넣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현실을 잊는다. 손에서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삼겹살과 비빔면으로 한 상 차리는 데 큰돈 드는 게 아니다. 두 딸과 식당에서 먹으려면 10만 원은 기본이다. 어쩌다 한 끼 먹는 게 지나친 사치도 아닐 테다. 이런 소박한 바람도 경제력이 따라줘야 한다. 빈 그릇만 남은 밥상은 자연스레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고민하는 대화로 다시 채워졌다.


6년 전이었다면 아마 밥만 먹고 자리를 피했을 수 있다. 그때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다. 아내도 나도 그저 직장만 다니고 있었다. 월급으로만 살았고 모아둔 돈도 없었다. 지금도 그때와 주머니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월급에만 의지해 한 달 살이 중이다. 다만 미래를 준비해 오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나는 6년째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내 일을 찾았다. 아내도 전공을 살려 새 직업을 갖겠다며 대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나는 그동안 책 몇 권을 썼고 그 경험을 살려 책 쓰기 강의를 준비 중이다. 아내는 학교에 집중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었다. 어쩌면 요즘이 더 불안한 시기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관점의 차이다. 아내도 나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지금은 과정일 뿐이라고. 당장 수입이 줄어 쪼들리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있는 돈으로 아껴 쓰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면 서로를 탓하거나 더 불안해했을 것이다. 아내도 나도 명확한 목적을 갖고 하루를 사는 중이다. 오늘 할 일에 집중하면 불안의 크기는 줄어든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내면 성취감의 크기는 커진다. 성취감이 불안보다 크면 당연히 걱정도 준다. 걱정이 줄어드는 만큼 희망도 커질 테고.


주말 오후 삼겹살과 비빔면을 양껏 먹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https://blog.naver.com/motifree33/223076712432


매거진의 이전글 부고, 동창 모임 있는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