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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n 13. 2023

글은 누구나 못 쓴다, 고칠수록 나아질 뿐이다


타인의 성공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 6년 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자기 계발서를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하나같이 근사한 성공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나도 같은 방법을 따라 하면 금방 부자가 될 줄 알았다. 읽고 또 읽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는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었다. 보이는 성공 이면의 노력이다. 내가 따라 해야 할 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멋모르고 글을 쓰게 되었고 블로그도 시작했다. 마흔셋에 블로그를 처음 알았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온라인 세상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온라인 세상은 상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웃수가 늘어날수록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들에게 일어나는 꿈같은 일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수백 명의 사람을 모아 강의를 하고, 자고 일어나니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가 오고, 며칠 뒤 자기 이름 내건 강의를 열기도 했다. 사람이 모이고 뜻밖의 기회가 생긴 건 모두 온라인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았다. 나에게는 별다른 노력 없이 그런 기회를 갖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 거로 믿게 되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매일 기록으로 남겼다. 다이어리를 쓰고,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적고, 하고 싶은 말을 한 편의 글로 남겼다. 기록이 쌓일수록 나도 제법 근사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우쭐했다. 더 잘하고 싶었다. 보이는 모습에 더 신경 썼다. 남이 보는 나에 신경 쓸수록 내가 보는 남의 모습도 더 눈에 잘 들어왔다. 비교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비교했다. 비교는 내가 쌓아온 노력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남들이 이룬 성과가 더 근사해 보였다. 내가 갖고 싶은 걸 그들은 쉽게 손에 넣는 것 같았다. 나에게 일어났으면 하는 일이 그들에게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노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방향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에 의심이 들었다. 의심은 나를 더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때는 의심과 비교가 얼마나 무의미한 생각인지 몰랐다. 생각이 만든 허상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우리가 하는 생각, 걱정의 94퍼센트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걱정이 걱정을 낳고, 생각이 생각을 키운다고 했다. 부정적일수록 생각과 걱정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생각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말아야 할 순간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평가나 판단, 의견, 추론, 비판일 때이다.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한다면》 샘 아크바


남들과 나를 비교했던 건 아마 나를 평가받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내 딴에 열심히 사는 모습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평가와 인정의 결과가 곧 성공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반응이 없으니 곧바로 비교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비교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다행히 벗어나는 방법을 배웠고 여전히 반복하는 중이다.


생각 자체를 바꾸고 피하고 처리하고 없애려는 노력 대신 생각과 당신의 관계를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생각을 좀 더 똑똑하게 관리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한다면》 샘 아크바


글을 쓰면서 남들과 비교했다면 글을 쓰면서 비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비교와 의심이 들 때면 그 순간의 나를 글로 적었다. 문제를 푸는 출발은 문제를 똑바로 이해하는 데 있다. 내가 가진 문제를 푸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쓰는 게 도움이 되었다. 글로 쓰면서 나를 한 발 떨어져 보게 되었다. 내가 나를 보는 게 쉽지 않았다. 남은 나를 냉정하게 볼 수 있지만 내가 나를 냉정하게 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나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건 어려운 만큼 가치 있다. 용기를 낸다면 어쩌면 남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다. 내가 나에 대해 쓰는 글은 그런 효과가 있었다. 글 덕분에 비교와 의심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의 성공 이면에 그들만이 쌓아온 노력의 탑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글쓰기에 막연한 불안감을 갖는 분이 있다. 이런 불안이다. '내가 글을 쓸 자격이 있나?', '내 글을 누가 읽을까?', '글을 잘 못 쓰는 데 써도 될까?', '글을 써 본 적 없는 데 잘 쓸 수 있을까?' 어떤 종류의 걱정이든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 앞에 말하는 게 힘들 듯 남들에게 보이는 글을 쓴다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이 느끼는 최고의 공포는 발표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말과 글이라는 도구만 다를 뿐 내가 쓰는 글도 누군가에게 읽히는 게 부담되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말과 글이 갖는 특성을 이해한다면 부담을 덜 수도 있다.


발표에 앞서 많은 시간 반복할수록 불안을 줄일 수 있는 게 사실이다. 발표 내용을 완벽히 숙지하고 같은 내용을 수없이 반복하면 덜 떨게 된다. 글도 같은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글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날것의 생각을 적은 초고. 초고를 다듬는 퇴고. 퇴고를 다시 다듬는 퇴고. 퇴고의 퇴고를 거듭할수록 글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0번 이상 퇴고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내가 글을 못 쓴다는 고민과 걱정은, 고민과 걱정이 아닐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바로 많이 쓰는 것이다. 많이 쓰면서 많이 고치는 게 글을 잘 쓰는 유일한 왕도이다. 시대를 거슬러도 글 잘 쓰는 대가는 그만큼 긴 시간 고치기를 반복했다. 오랜 퇴고 끝에 세상에 나온 글을 우리가 읽는 것이다. 아마 톨스토이가 살아나 《죄와 벌》을 다시 퇴고한다면 지금보다 더 뛰어난 소설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글을 못 쓴다는 걱정과 불안, 의심은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런 생각에 에너지를 주기보다 단 몇 줄이라도 꾸준히 쓰는 게 오히려 글 실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다. 근사한 글 한 편을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땀 흘린 이들이 성공하듯 매일 꾸준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한다면 제법 근사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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