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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05. 2023

자책에서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

자책 - 남과 비교하는 나


누구에게나 마음이 심란한 때가 찾아온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준비했던 일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았거나,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 때문이거나, 남들은 쉽게 얻는 게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자책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남들 모르게 지하 100층까지 내려가곤 한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올라오길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포기하는 사람은 빛이 들지 않는 지하 몇 층에서 다시 시작해 보지만 지상으로 올라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이마저도 중간에 포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자책부터 한다. 엊그제도 남들과 나를 비교했었다. 비교의 감정은 다양했다. 남의 성과를 질투했고, 나의 부족함을 원망했고, 남들만큼 못하는 자신을 탓했었다. 그러니 비교라는 감정이 한 번 올라오면 일상이 멈출 만큼 영향력이 컸다. 그만큼 벗어나는 것도 어려웠었다. 하지만 읽고 쓰기를 통해 영향력을 점차 줄여왔다. 자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내가 자책에서 벗어나 다시 회복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자책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어떤 이유로 자책하는지 구체적으로 써본다. 글로 쓰면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하나씩 되짚어본다. 하나씩 거슬러 가다 보면 자책의 출발점과 만나게 된다. 쓰지 않았다면 알 수 없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주하지 않게 된다. 사람의 뇌는 불편한 걸 싫어한다. 나의 실수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민낯을 마주하는 걸 뇌는 싫어한다. 그래서 생각으로만 끝내고 만다. 하지만 글로 쓰기 시작하면 좋든 싫든 나의 잘못을 눈으로 마주하게 된다. 일단 마주하게 되면 외면할 수 없다. 현재 상황을 인식하고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면 해결책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자책이 들 때는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글로 적는다.


둘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글을 쓰면서 나를 인식했다면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게 된 상태다. 그 문제는 이전부터 반복돼 왔던 게 대부분이다. 때마다 반복하며 나타나는 식이다. 이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 주변을 환기시키는 의미이다. 이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게 독서다. 공교롭게도 이럴 때 읽는 책에서 고민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책에서 말하는 내용에 무릎을 치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다. 그러고 나면 문제가 문제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 건 아니다. 단지 같은 문제를 조금 다르게 보고 나만의 해답을 갖는 정도이다. 이 또한 고민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오늘 쓰면서 내일이 달라질 거란 희망을 갖는다.

자책할 때 쓴 글이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이라면, 답을 얻은 뒤 쓰는 글은 희망을 적는 글이다. 자책이라는 수렁에 빠져있을수록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발버둥 치면 더 빠지는 게 수렁이다. 그럴 땐 몸을 가만히 두는 게 방법일 수 있다. 가라앉다가 어느 순간 발이 닿고, 그때 다시 딛고 올라오는 거다. 올라올 때는 가라앉을 때와는 달라야 한다. 희망을 갖고 다시 올라간다. 희망은 누구에게 받는 게 아니다. 스스로 품는 것이다. 시련의 크기는 달라도 이겨내는 건 결국 자신이다. 희망의 크기도 스스로 마음먹기 나름이다. 희망을 품은 나는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자책했던 나를 인정하고 조금 다른 시선을 갖게 된 나는 더 나은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회복 탄력성은 외부에서 가해진 힘이 제거됐을 때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성질을 의미한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뜻하지 않는 사고,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결정, 내 힘이 닿지 않는 선택.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다음의 선택이다. 일이 벌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말 것인지, 아니면 반대의 선택을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이때 반대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회복 탄력성'이 높다고 말한다. 


나는 예전에 회복 탄력성이 없었다. 일어난 일에 순응하고 변화를 두려워했고 의지대로 살지 않았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잘 못했기 때문에, 내 능력 밖의 일이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단정했었다. 그렇게 30년 넘게 살았던 것 같다. 6년 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되돌아보면서 이전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다르게 선택했다. 매일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탄력성을 키워왔다. 여전히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한 번씩 자책이 밀려들 때면 앞에 적은 세 가지 방법으로 이겨내는 중이다. 다행인 건 이 방법이 제법 잘 통한다. 읽고 쓰기를 반복하였기에 얻을 수 있는 효과다.


자책하는 내 모습도 나다. 자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도 나다. 어떤 모습이든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그러니 내 모습이 싫다고 외면해 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다. 미운 모습도 끌어안을 때 나는 더 성장하게 된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성장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해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다. 매일 읽고 쓰면서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일상을 사는 나를 사랑해 준다. 내가 나를 아끼지 않으면 남도 나를 아끼지 않는다. 스스로를 아끼는 나 자신이 너무 좋다. 시련에도 꿋꿋이 회복하는 내 모습이 대견하다. 이렇게 오늘 쓰면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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