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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ug 15. 2023

아직은 달리기를 말할 때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달린다


새벽 5시, 주변은 고요했다. 선풍기만 돌아간다. 어둠 속에 매미도 잠잠하다. 노트북을 열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글도 잘 써질 것 같다.


빈 화면에 거침없이 써 내려갈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몇 줄 쓰다가 멈추고, 다시 몇 줄 쓰다가 멈췄다. 생각이 많을 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빈 화면 한 귀퉁이에 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달리려면 빨리 글을 마무리해야 했다.


날이 밝아올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쓰던 글을 마무리하자니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다. 그 시간이면 슬금슬금 더워질 때다. 자칫 더위 때문에 완주를 못할까 걱정됐다. 그러니 더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


이럴 땐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게 맞다. 노트북을 덮는 손끝이 가볍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소풍이라도 가는 듯 기분이 들뜬다. 새 옷, 새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8월 15일, 8.15킬로미터 달리기에 도전한다. 가수 션씨가 활동하는 '헤비타트'에서 주관하는 광복절 기념 달리기 대회다. 각자 원하는 곳에서 3킬로미터, 4.5킬로미터, 8.15킬로미터 중 선택해 달리고 인증하는 행사다. 몇 주 전부터 8.15킬로미터를 달리기 위해 연습했다.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연습으로 8.15킬로미터 완주를 다섯 번 했었다. 완주할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몸 조심해야 했다. 생각하지 못한 일이 생길 수 있고, 몸에 이상이 올 수도 있다. 평소대로 스트레칭을 하고 시계를 맞췄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기온이 제법 올랐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난 길은 선선했다. 온도계는 27도를 가리켰지만 달리는데 무리가 없었다. 적당히 선선했고 적당히 더웠다. 달리는 내내 달릴 만한 날씨였다.


나와 같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반대편에서 달려온다. 무리 중 몇몇이 파이팅을 외친다. 혼자 달리는 나를 위한 응원인지는 모르겠다. 누구를 위한 응원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대열 중 눈이 마주치는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파이팅 구호는 언제나 힘이 나는 법이니까.


4킬로미터까지는 달릴만하다. 이후부터는 서서히 체력에 한계가 온다. 6킬로미터가 넘으면 정신력과의 싸우이다. 연습할 때도 항상 그때가 고비였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7킬로미터를 넘기면 다시 힘이 난다.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마의 구간 6킬로미터, 내 앞으로 머리가 짧고 몸이 단단한 세 명이 나란히 달리고 있다. 얼핏 들리는 말투가 군인인 것 같았다. 그들 뒤를 따라서 달리기로 했다. 혼자 달리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다. 달리는 속도도 비슷해 무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 덕분에 고비를 넘겼다.


오늘도 연습했을 때와 비슷한 시간에 완주했다. 몸에도 무리되지 않았다. 평소와는 의미가 다른 레이스였다. 목적이 분명했다. 도전이었다. 성공하고 싶었다. 이 날을 위해 준비했다. 꼭 성공하고 싶었다. 도전에 성공한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끼는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책도 썼다. 나는 달리기를 말할 때 말하고 싶은 게 아직은 없다. 지금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달리는 게 이유이다. 달리면서 남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달리기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은 모르겠다. 달리기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달리기가 좋고 재미있다. 흘리는 땀만큼 먹고 싶은 걸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본능에 충실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굳이 좋은 걸 찾자면 글감이 하나 늘었다는 거다. 오늘도 새벽에 쓴 글은 서랍 속에 넣었다. 이어서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쓸 말이 안 떠올랐다. 이때가 싶어 달리기에 대해 썼다. 이대신 잇몸으로 말이다. 6년 동안 책을 읽으니 책에 대해 할 말이 조금은 생겼다. 식단관리를 3년째 해오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조금은 생겼다. 6년째 글을 쓰다 보니 글쓰기에 대해 아주 조금은 할 말이 생겼다. 달리기는 이제 6개월 정도 됐다. 그러니 달리기에 대해 할 말은 아직 없다. 그저 글감이 될 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는 건 명사다. 작가, 강사, 직장인 등 명사가 나를 말해준다. 명사가 되려면 동사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동사의 삶을 살 때 명사를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글을 쓸 때 작가가 되고, 강의할 때 강사가 되고, 직장에서 일할 때 직장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달릴 때 달리는 사람이 된다. 달리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그만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꾸준히 달리면서(동사) 달리기에 대해 말하는 사람(명사)이 될 수 있다. 달리기에 대해 할 말은 아직 없지만 왜 달리는지는 명확하다. 목적이 분명하면 적어도 쉽게 포기할 일은 없다. 글쓰기를 평생 직업으로 삼았듯, 글을 쓰는 동안에도 달리기를 계속해 볼 작정이다. 달리다 보면 무라카미 하루끼처럼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말도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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