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추억을 먹고 자란다

나의 흑역사 모음

by 김형준

#.1 호구


215,000원으로 기억한다. 아르바이트비로 못 받은 돈이다. 그만두면서 몇 차례 항의했지만 어깨 행님들은 꿈쩍 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상대하기엔 왜소했고, 내 몸이 먼저이니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이야기는 이랬다.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까지 반 년의 시간이 있었다. 부모님은 더 이상 학비 지원이 어렵다고 선을 그으셨다. 나도 더 이상 손 벌리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뭘 하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24살, 몸이 재산일 때였다. 시작은 막노동이었다. 뜨내기 잡부가 아닌 팀을 이뤄 다니며 기술도 배울 수 있는 고정 직이었다. 두 달 반을 따라다니며 얇은 기술도 배울 수 있었다. 첫 달은 20일 정도 일했고, 일당 5만원으로 계산해 제법 큰 돈을 벌었다. 어디나 첫 달은 돈을 잘 준다. 손이 부족해 잡아 두기 위한 방법이라는 걸 뒤 늦게 깨닫았다. 다음 달 월급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했다. 열흘 정도 지나자 겨우 받았다. 불안했다. 일도 줄었다.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반 달치는 두 달 뒤 받을 수 있었다. 학비를 충당하기엔 부족했다. 또 다른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다. 당시는 벼룩시장(생활정보지)이 호황이었다. 인터넷(전화로 접속하던 시기였다)이 자리잡아가던 시기라 사람들은 벼룩시장을 더 선호했었다. 벼룩시장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일자리부터 부동산 매물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정보가 망라되어 있었다. 내 일자리도 그 안에 있을 거라 믿고 열심히 찾았다. 눈에 띄는 정보가 있었다. 시급 오 천원, 네 시간 근무, 광고홍보 대충 이랬다. 시급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는 평균 삼 천원 정도로 기억한다. 그에 비하면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근무시간도 맘에 들었다. 네 시간 바짝 일하면 하루 종일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다른 아르바이트도 가능할 거란 계산이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문을 두드렸다. 별다른 면접없이 다음날 출근하라고 했다. 너무 쉽게 대부업에 몸 담게 되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랬다. 자동차 담보 대출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고,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운전석 유리에 홍보 명함을 꽂아 두는 일이었다. 업체를 중심으로 반경 2km 범위의 주택가를 돌며 눈에 보이는 차에 홍보 명함을 꽂는 일이었다. 그 지역은 평지20%, 언덕 80% 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네 시간동안 산 몇 개를 넘어 다니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시급을 많이 줬다. 아니 양심 있는 사업주라면 더 줘야 했다. 더 달라는 말이 입 안에 맴돌았지만 그들의 외모는 모든 말을 자연스레 삼키게 했다.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다. 이 일의 장점은 딱 하나, 걷기이다. 수 많은 언덕을 오르내린 결과 백 만 불 짜리 각선미를 가질 수 있었다.(지금은 만원도 안 쳐줄 것 같다) 가장 큰 단점은 경쟁업체와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여러 업체가 있다 보니 같은 시간 동선이 겹치기도 한다. 나는 이미 꽂혀 있는 다른 업체의 명함을 빼 버려야 했고, 다른 업체도 내가 꽂은 명함을 빼 버려야 했다. 상대방과 안 마주치면 다행이지만 혹 마주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몸의 대화이기 보다 눈빛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험악한 말을 내 뱉는 게 느껴졌다. 순진했던 나는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정말 순진 했었다) 바나나 우유는 빨대로, 치킨은 맥주와, 쓴 아메리카노엔 달달한 케익이, 삼겹살에 소주가 제격 이듯, 우리 각자는 자신의 성향과 맞는 일이 있고, 이런 일을 할 때 몸도 마음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달 반을 다녔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삼겹살에 양주를 먹는 것 같이 내 입맛과는 따로 노는 거 같았다. 그렇게 불편함이 커질 즈음 그만두게 되었고, 그만두는 시점까지 일했던 급여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다음주에 오면 주겠다고 했다. 다음주 되자 연락이 안 되었다. 찾아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알았다. 대부업이 대부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는 걸. 새벽 잠을 이겨내며, 수많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경쟁업체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며 모아온 내 피와 살 같은 215,000원은 그렇게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행님들의 어깨에 영양분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 일 말고도 내 목소리를 제대 못 낸 적이 많았다.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나 하나 참고 말지 하며 넘어간 게 많았다. 그로 인해 돈을 떼이기 했고, 일자리를 잃기도 했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기도 했다. 똑 같은 경우 다른 이들은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빼앗긴 걸 되찾는 걸 봤다. 그런 그들을 볼 때면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었다. 왜 나는 내 목소리가 없는지 한심 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타고 났다고 치부해 버렸다. 합리화하고 회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늘 같은 논리였다. 그냥 참자. 참으면 더 좋을 때가 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불합리한 일에는 내 목소리를 낸다. 감정이 격앙되며 큰 소리 칠 필요 없다.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에 더 힘이 생긴다. 차분할수록 상대도 나를 더 조심하게 대한 다는 걸 알았다. 당당하게 내 것을 지키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는데. 더 이상 내 인생에 호구는 없다.



#.2 왜 나만


그곳에 가면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그곳에 가면 잊었던 열정이 되 살아난다. 그곳에 가면 숨어 있던 승부욕이 깨어 살아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 승자가 내일은 패자가 되는 곳이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던 곳,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되었던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갖게 될지 몰랐다.


열 일곱 살이었다. 학교, 친구, 환경 모든 게 새로웠다. 인문계가 싫어 실업계를 선택했고, 건축과를 다녔던 작은형이 보기 좋아 뒤를 따라 같은 학교로 진학했다. 3년을 함께 보낼 친구들을 만났다. 정원 55명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한 반에 모였다. 어디나 처음은 어색하다. 젊음(?)이 좋은 건 이런 어색함도 며칠이면 사라지게 된다. 고입을 위해 치열하게 중3을 보낸 우리는 새로운 일탈이 필요했다. 탈선이 아니다. 숨통을 트여 줄 일탈이다. 친구 중 일찍 자아가 깬 몇몇은 어른의 세상을 먼저 경험했다. 그들이 추천한 일탈이 당구였다. 지금은 당구를 스포츠로 인정하고 건전하게 활성화되었지만, 그때는 만 18세 이하는 당구장 출입이 불가했다. 성인만을 위한 놀이였다. 그걸 알면서도 학교 앞 당구장은 학생들 출입을 제한하지 않았다. 단속이 자주 있지도 않았고 걸려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분위기도 한 몫 했다. 또 학생이라 당구비를 할인해 주지 않기에 괜찮은 수입원 중 하나였다.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 서로 지켜야 할 룰은 있었다. 학교에선 교복, 당구장에선 사복이었다. 학생과 민간인을 구분 짓는 유일한 기준이 교복이기 때문이다. 열정적인 친구는 항상 갈아 입을 한 벌을 갖고 다녔다. 그렇지 못한 친구는 상의 정도는 갈아 입는 성의를 보였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우리가 당구장을 찾는 건 탈선이 아닌 친목도모와 운동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룰에 충실하며 학기 중 주5일 당구장을 다녔다. 당구 실력은 투자한 비용에 비례한다. 게임을 많이 할수록 실전 경험이 쌓이고 경험이 곧 실력으로 드러나는 게 이치였다. 진정한 고수는 게임비를 내지 않는다. 하수는 고수와 게임하며 실력을 늘리고 고수는 기술을 전수하며 게임비를 아낄 수 있다. 모든 게임이나 오락이 그렇듯 거기에 들이는 비용을 모으면 차 한 대 살 돈이 된다는 농담을 한다. 당구도 그랬다. 열심히 치고 난 뒤 계산할 때면 이런 후회가 밀려온다. 후회는 후회일 뿐 어디서 돈이 나오는지 다음 날 또 발걸음은 당구장을 향해 있었다.


방학은 각자 도생의 시간이다. 한 달 동안 특훈 하는 친구도 있고, 휴식기를 갖는 친구도 있었다. 공부했다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공부는 입학과 동시에 손을 놓았다. 방학 중 유일하게 실력확인 할 수 있는 날은 소집 일이었다. 소집일은 지루한 방학에 활력을 주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당구장을 갈 수 있는 날이다. 그 날도 모든 게 완벽하게 느껴졌다. 일찍 학교문을 나서며 자연스레 단골 당구장을 찾았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겨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게임이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경계가 풀리면 일이 터지고 만다. 갑작스레 당구장 문이 열리며 익숙한 복장의 아저씨 둘이 들어온다. 제복이었다. 그때 알았다. 내 친구들이 그렇게 빠르다는 사실을. 누구는 당구대 밑으로, 누구는 화장실로, 누구는 태연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불행이도 그 시간엔 우리 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굴비 한 두름은 열 두 마리다. 나를 포함 열 두명의 친구들은 근처 파출소에 나란히 앉아 있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당구는 사행성이라 하여 청소년에겐 불법이었다.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열 일곱 살 범법자가 되었다.

우리는 각자 앞에 높인 백지에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열심히 써 내려갔다. 한 장의 반성문을 완성해 제출했다. 몇 장을 넘겨보던 경찰 아저씨는 내가 쓴 반성문에 시선이 멈췄다. 전화번호를 보고 곧바로 눌렀다. 오! 이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 나이까? 제발 아무도 받지 마라. “여보세요 000 학생 집이죠?” 이런 젠장 아버지가 받으셨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주의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다음은 누가 될지 다들 조마조마 하고 있었다. 웬걸 열심히 반성 하라고 하신다. 다음부터 가지 말라고 하신다. 따로 연락 안 할 테니 다음엔 그곳에서 안 봤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그렇게 우리 열 두 명은 파출소를 나섰다. 열 두 명 중 나만 집에 전화를 걸었다. 나만 당구장을 간 불량 청소년이 되었다. 다행이 부모님은 별 문제 삼지 않으셨다. 당당하다고 말하긴 웃기지만 당구장에서 당구만 쳤다. 문제가 될 행동은 절대 안 했다. 그런 나를 믿어 주신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십 오 년이 지났다. 지금도 친구를 만나면 가끔 당구장을 간다. 여전히 그때의 구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저 함께 웃고 떠드는 그 시간이 좋다. 당구비 걱정 없이, 승패를 떠나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이제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곳에 있으면 그때의 추억 속에 있는 착각이 든다. 그때의 나이로, 그때의 감성으로 그때의 순수함으로 돌아 가는 것 같다. 여전히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삶에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나의 흑역사는 언제나 회자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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