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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22. 2024

내 우산이 탐났나요?

욕망에는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힘입니다. 노자는 "과도한 욕망보다 큰 참사는 없다. 불만족보다 큰 죄는 없다. 탐욕보다 큰 재앙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욕망은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반대의 의미로 알렉산서 A. 보고몰레츠는 "인간은 욕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욕망은 창의성, 사랑, 그리고 장수를 촉진하는 강력한 강장제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욕망은 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두 가지의 욕망 덕분에 이제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욕망이 있었기에 더 나은 삶을 선택했고, 때로는 욕망 때문에 불편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이 둘을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에 따라 내일의 나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글을 써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도 일종의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잘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내 글에 공감하며 작은 변화를 결심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읽어보지도 않고 반감부터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입니다. 선택을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까지입니다. 저는 글 한 편 써내며 욕망을 채웁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냄으로써 원하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날이 반복되면 글도 쌓입니다. 쌓인 글은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책이 될 수도 있을 테고요. 매일 글을 쓰겠다는 욕망을 시작으로 궁극에는 더 큰 가치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더 나아지는 일종의 '강장제'입니다.


더 좋은 직장을 욕망하는 건 직장인에게 당연합니다. 18년째 직장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욕망 덕분입니다. 욕망만 있다고 직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욕망에 걸맞은 역량 또한 갖추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역량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곳에 이력서를 보내도 결국에 그저 그런 곳에서만 연락이 왔었으니까요. 그마저도 실력이 아닌 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욕망이 앞서 현명한 선택을 못 했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두 번이나 제 발로 망해가는 회사에 찾아갔었으니까요. 몇 달 동안 직장이 구해지지 않으니 상한 줄 알면서도 덥석 물어야 했었습니다. 참을성을 갖고 제대로 된 역량을 키웠다면 보다 나은 직장을 선택해 갔을 겁니다. 지나고 보니 노자가 말한 과도한 욕망 탓에 직장 생활이 순탄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좀 더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탐욕도 부리지 않았을 텐데요. 욕망 탓에 이제까지 재앙 같은 직장 생활을 이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르는 게 무엇인지 모를 땐 알려고도 안 했습니다. 책을 한 권씩 읽으며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한편으로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모르는 게 죄가 아니고 모르면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고 배우겠다 욕망했습니다. 무엇보다 '빨리'를 내려놓았습니다. 빨리 배우겠다고 욕심낸 들 채울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난 시간은 인정하고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맞느냐가 더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배워가면 적어도 남은 시간은 이전처럼 안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길 욕망해 왔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새벽 기상, 일기 쓰기, 책 읽기, 글 쓰고 책 쓰고 강의까지 해내며 하루를 삽니다. 모르는 걸 인정하고 배우겠다고 마음먹으며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욕망했기에 이전보다 충만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매일 그래왔듯 비가 왔던 어제 아침에도 회사 근처 빽다방에서 글을 썼습니다. 쓰고 왔던 우산은 잘 접어 입구 우산통에 넣어뒀습니다. 30분 정도 화면에 빠져 있었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오며 우산 통을 보니 제 우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테이블 여섯 개뿐인 공간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바꿔간 게 분명했습니다. 손이 떨리고 화가 났습니다. 화면으로는 눈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봤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우산으로 착각하고 가져갔을 수도 있으니 하루 동안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직원분에게 우산 모양을 설명하고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출근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저와 같은 사례가 많았습니다. 고의로 훔쳐 갔다고 판단해 상대방을 절도죄로 고소했다는 사례도 봤습니다. 아마 제 손에 우산이 다시 오지 않는다면 분명 고의로 훔쳐 간 게 맞을 겁니다. 어째서 제 우산이 탐이 났을까요? 탐이 날 수는 있어도 훔쳐 가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봐야 갖고 있는 내내 마음만 불편할 테니까요. 우산을 펼 때마다 그 찜찜함을 견딜 자신이 있는가 봅니다. 아마 그 사람은 우산이 고장 나면 아무렇지 않게 버릴 겁니다. 그리곤 또 다른 우산을 탐할 겁니다. 욕망은 끝이 없을 테니까요.


살면서 정말 필요한 건 자신을 변화시키고 더 성장시키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고,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책을 읽고 공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가치 있을 겁니다.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할 것이고요. 자신의 역량도 모른 체 더 좋은 직장만 바랐던 예전 저와 남의 우산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간 그 사람의 욕망은 자신을 망칠 뿐입니다. 욕망한다고 모든 걸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물론 나와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한 욕망은 얼마든 욕심내야 할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마음이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올바른 욕망만이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라건 데 우산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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