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사 사회 - 송병기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가 낯설었다. 세월을 견디지 못한 무릎 연골 때문에 걷는 게 점점 불편해졌다. 절에 다니고 공공 근로와 문화센터 수업을 듣기 위해 이동이 잦은 편이다. 그러니 무릎을 방치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랜 고민 끝에 연골 이식 수술을 결정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다. 2주 정도 재활 치료를 마치면 걷는 게 한결 편해질 거란다. 다만 남은 한쪽 무릎도 근간에 수술해야 보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된다.
매달에 절을 찾고, 공공 근로로 사람을 만나고, 문화 센터에서 영어를 배우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혼자 지내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선택들이었다. 사람을 좋아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자식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닌가 싶다. 무릎 수술을 결정한 것도 자식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마음이 더 컸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당신 스스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70대 중반이다. 혼자 지내기보다 시설 좋은 요양원에서 보호와 관리를 받는 게 필요할 때이다. 물론 당신의 선택이 먼저이긴 하다. 자식이 비용을 부담하고 요양원에 모시는 것도 일종의 효도라고 생각한다. 몸은 점점 나이 들어가고 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들 때 안정된 관리 안에서 생활하는 것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월급쟁이가 감당해 낼 수준이 아니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오늘날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노인 시설로만 볼 수는 없다. '국가의 발전과 미래'를 출산율(생산인구)로 환원하는 인구 위기론에서 돌봄이 필요한 노인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의존적 노인', 그를 둘러싼 규범, 가치, 감각, 기준, 법 등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라는 실체로 현현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정상 가족'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를 위기로 상정했고, 발전에 쓸모 있는 인구와 쓸모없는 인구를 분류했다. 의존적인 노인은 이러한 정치적 상상과 인식 속에서 선별되고 의료적, 생물학적 자원으로 규정된 '인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인 셈이다.
《각자도사 사회》 - 송병기
65세 이상이면 기초연금 대상이다. 경제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는 제도이다. 생활비, 교통비, 통신비 등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그나마 경제력이 있으면 이런 혜택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 편하고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는 남은 시간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 국가에서 지원받는 게 전부인 노인은 생활 반경이 줄어든다. 하고 싶은 일에서도 멀어진다. 더욱이 병든 몸을 온전히 치료받지 못해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리게 된다.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은 입소 노인에게서 임종 증세를 발견하면 곧바로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해 응급실로 가기를 요청했다. 간호부장은 이곳이 노인들의 여생을 보내는 마지막 집이지, 임종 장소는 아니라고 했다. 요양원은 병원도 호스피스도 아니라는 이유였다. 임종은 병원이나 집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요양원은 의사가 없는 의료 '복지' 시설이다. 노인이 임종했을 때 보호자가 의혹이라도 제기한다면 요양원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당국의 수사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자도사 사회》 - 송병기
요양원이 임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요양원은 여생을 보다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복지 시설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돈이 있는 노인에게만 허락된 곳이다. 이 또한 죽음 직전까지만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치인 셈이다.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을 곳은 의료진이 있는 병원이나 자신의 집이어야 한다. 하지만 노인연금을 받는 이들에겐 집도 병원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집이든 병원이든 선택할 여건이 된다면 그나마 안락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 물론 안락한 죽음은 드물다. 이 또한 일종의 축복이자 혜택일 테니 말이다.
일부 노인은 기본 혜택에서조차 받지 못한 채 살기도 한다. 뉴스에서 보는 노인 자살, 고독사가 그들의 단면을 보여준다. 가장 기본인 국가에서조차 외면받은 죽음이다. 비단 그들의 가족만 탓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의 가족 또한 다른 면에서 피해자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국가가 한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책임져 줄 수는 없다.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혜택에서 소외되는 이들은 최소화해야 할 의무는 있다. 복지의 질은 차치하더라도 기본적인 혜택만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노인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혜택에서 멀어진 이들을 어쩌면 국가가 죽음을 방조하는 건 아닐까?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으로 죽음의 풍경은 달라졌을까? 시민들은 연명의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의료진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고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찻잔 안의 태풍이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연명의료를 놓고 벌어진 우여곡절은 의향서나 계획서 같은 '문서'가 없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의료진 간의 불신,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 간의 갈등, 얄팍한 사회보장제도는 변함이 없다. 노인 자살, 간병 살인, 고독사 소식도 끊이지 않고 있다.
《각자도사 사회》 - 송병기
오래전부터 꿈꿔온 죽음이 있다. 생전 장례식을 치를 것이다. 죽고 나면 누가 나를 찾아줄지 모른다. 나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이들에게 애도할 기회를 주고 싶다. 실제 일본에서 생전 장례식을 치른 이도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을 죽기 전에 만난다는 건 죽음이 주는 무게를 한결 가볍게 해 줄 것이다. 남겨진 이들에게도 깊이 애도하고 추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테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인정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연명의료에 대한 인식도 최근 들어 변화해 가는 추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끝까지 보살피지 못한 가족에게는 아쉬움과 미안함을 남기고, 더 오래 죽음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의료진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묻기도 한다. 오롯한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공증된 문서가 있으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가족도 의료진도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우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갈등과 불신이 여전하다면 죽음을 둘러싼 대립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잘 죽길 바라지만 죽음은 예고도 계획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에게 최선인 선택을 할 뿐이다. 불행히도 최선이 무엇인지 어느 누구도 명쾌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죽음을 마주한 이들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죽음이 어떤 모습인지 이 책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어느 때가 되면 잘 죽길 바랄 것 같다. 그때는 아마 살아온 삶에 후회가 없고 남은 생에 기대가 적어질 때이지 않을까 싶다. 이 말은 그만큼 잘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잘 죽기를 바란다면 잘 사는 게 먼저일 것 같다. 잘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오늘을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오늘에 만족하고 해야 할 일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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