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산 입구 주차장에 10시까지 모이기로 했다. 다른 직원들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나만 집에서 출발했다. 약속은 10시에 했지만 제시간에 올 것 같지 않았다. 전날 분명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테니까. 예상대로 주차장에 모두 모인 시간이 11시였다. 한눈에 봐도 대부분 산에 오를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은은하게 향기를 내뿜는 디퓨져처럼 누구든 반경 1m 이내에 알코올 향을 뿜었다. 아침으로 해장을 간단히 했다지만 온몸에 알코올을 잔뜩 머금은 모양새다. 개중에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얼굴도 보였다. 가뜩이나 전날 내린 눈 때문에 산행이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안전기원제 때문에 준비한 워크숍이라 산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두 개 코스로 나누어 출발했다. 짧고 가파른 코스를 선택한 이들은 술이 덜 깬 게 확실했다. 힘든 게 싫고 산행도 싫은 그 나만 정신을 차린 이들은 자연히 완만한 코스를 선택했다. 어느 코스로 가든 눈 때문에 애를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산 중간쯤부터는 쌓인 눈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앞사람이 남긴 발자국만 따라가야 했다. 자칫 누구 하나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안전사고가 발생한 안전기원제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겨울 산에 오를 땐 체온 유지를 위해 입고 벗기 쉬운 옷을 여러 겹 입으라고 한다. 얇은 옷을 입은 탓인지 겨우내 보지 못했던 몸매가 드러나 보였다. 도대체 전날 무엇을 얼마나 먹었길래 저리도 팽팽한 봉우리를 하나씩 만들어놨단 말인가. 나이 불문 저마다 이제껏 켜켜이 쌓아온 정성이 대단해 보였다. 이들 중 올라가는 내내 곡소리 낼 사람 여럿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가던 이들은 중간도 못 가 점점 뒤처졌다. 따라잡으려고 안 해도 알아서 따라 잡혀줬다.
남자는 입이 무겁다고 누가 그랬나? 수다는 오히려 남자들이 더 잘한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말한 기운은 있는가 보다. 앞서거나 뒤따르거나 무리끼리는 대화가 멈추지 않는다. 속 깊은 대화는 아니다. 실없는 농담이 대부분이다. 아마 그렇게라도 떠들어야 힘이 덜 드나 보다. 들어보면 건강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몸이 붇기 전에는 이 정도 산은 거뜬했었다고, 뱃살 빼는 데 등산이 최고라고, 30년 전 몸무게는 지금의 절반이었다는 등 과거를 끄집어내는 이야기뿐이다. 또, 하나같이 나름 건강 정보는 빠삭하다. 혈압을 낮추는 데 무엇을 먹으면 좋고, 당뇨에게는 이런 게 도움 되고, 뱃살 빼려면 이렇게 하면 효과 있고, 관절에는 무슨 운동이 좋다는 식이다. 다들 아는 건 많은데 정작 건강 상태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2년 전 산에 갔을 땐 나도 두 발로 시작해 네 발로 정상에 올랐었다. 쉬어도 쉬어도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중간도 못 올라가 다리가 풀렸고 근육통으로 며칠 동안 절룩거렸다. 몸무게는 10킬로그램 뺐지만 근육을 만들지 않았다. 근력이 부족하면 살을 뺀 의미가 없다고 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작년 한 해 동안 틈틈이 달렸다. 3킬로미터를 시작으로 요즘은 10킬로미터까지 달리게 되었다. 한 번 달리고 나면 온몸이 뻐근하다. 숨차게 땀을 쏟고 나면 정신이 맑아진다. 힘들어도 계속 달리게 되는 이유이다.
1년 동안 꾸준히 달린 덕분인지 정상까지 수월했다. 앞사람 속도에 맞추느라 가다 서다 반복한 탓인지 달릴 때보다 수월하게 올랐다. 땀도 많이 안 나고 숨이 차지도 않았다. 정상까지 300미터 남았을 때는 혼자서 전력으로 내달렸다. 우리 코스에서는 내가 1등으로 정상을 밟았다. 단 한 사람, 15년째 테니스를 치는 준 선수급 체력을 가진 관리 이사는 가파른 코스를 따라 이미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풍수지리에서 '배산'은 뒤로 산을 등지고 있는 땅을 의미한다.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다. 중년 남자에게 '배산'은 배가 산 같다는 표현이다. 더할 나위 없이 쓸모없는 살 들이다. 저마다 배에 산 하나씩 갖고 힘들게 힘들게 산에 올랐다. 출발할 때 산만한 배를 보며 어찌 오를까 걱정이 됐었다. 다행히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라 근근이 정상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다들 약속이나 한듯한 마디씩 했다. "뱃살 좀 빼야겠다"라고.
다들 안다. 뱃살을 빼고 건강을 지키는 방법을. 하지만 실천하는 건 쉽지 않다. 여간해서는 꾸준히 실천하는 게 어렵다. 직장인 중년 남자의 일상은 뻔하다. 일과 사람에 치여 받은 스트레스를 술로 푼다. 늦은 퇴근은 야식과 반주를 부른다. 주말에는 운동보다 잠이 먼저다. 한 주 동안 고생한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보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한 주를 반복한다. 어느새 배는 산이요, 옆구리에는 튜브가, 얼굴에는 호빵을 품었다. 이런 그들에게 잔소리할 자격 있는 사람 없다. 그들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중이다. 그들이라고 뱃살, 옆구리 살, 지방간, 당뇨, 고혈압 등을 원해서 가진 이 없다.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낸 죄밖에 없다. 다만 더 늦기 전에 정말로 자신을 위해서 건강 관리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이미 흘러간 옛날 옛적 자신의 모습을 붙잡고 있지만 말고 다시 그때의 모습을 되찾아 보는 거다. 안 해봐서 못하는 거지 해 보면 못할 사람 없다. 정말 건강해지면 인생도 더 살만해질 거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이미지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그게 가능하다고? 궁금하면 직접 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