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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19. 2024

"똥은 집이 편하다고" 화장실을 편애하는 둘째에게

열 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다. 그중에서도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을 수 있다. 열 손가락이 다 똑같은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다른 손가락보다 조금은 더 아픈 게 있기 마련이다. 두 딸을 키우지만 때에 따라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편애는 아니다. 상황에 따라 마음을 더 주고 잔소리를 더 하는 정도의 차이랄까. 위로가 필요한 아이에게 태도를 나무랄 수 없고, 꾸짖어야 할 상황에 마냥 공감만 해줄 수 없는 이치이다. 어제 두 딸에게 있었던 일이 그랬다.


둘째가 배가 아프다면 11시쯤 집에 왔다. 아내는 화장실에 못 가 아픈 거 아니냐고 물었다. 둘째도 그런 것 같아 학교 화장실에 갔었지만 똥이 안 나왔단다. 배가 계속 아파 의무실에도 갔지만, 별다른 조처를 할 수 없었던 선생님은 조퇴를 시켜준 것 같다. 그 길로 집에 온 채윤이는 엄마가 챙겨준 핫팩으로 배에 찜질했다. 얼마 뒤 시원하게 볼일 봤는지 수학 학원과 태권도에는 아무 일 없듯 다녀왔다. 9시쯤 집에 들어가니 도장에 다녀왔는지 도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표정은 낮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를 만큼 밝고 편안해 보였다. 늦은 저녁밥을 먹는 둘째에게 한 마디 했다. 

"다음에는 그러면 안 돼. 학교에 갔으면 학교에서 해결을 해야지. 정말 아프면 몰라도 화장실에 못 가 배가 아프다고 조퇴하는 건 아니야"

내 말이 못마땅한 지 한 마디 하려다 참는 눈치다. 아마 내 말이 서운했었나 보다. 자기 딴에는 정말 아프고 심각했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먼저 공감해 주는 게 순서였을 거다. 그러고 나서 잘잘못 따져도 늦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일 때문에 늦겠다고 아내에게 전화했다. 저녁밥도 먼저 먹으라고 했다. 큰딸은 학원에 가려고 이미 저녁밥을 먹는 중이라고 한다. 늦는 김에 10시 넘어 끝날 큰딸을 태워갈까 싶었다. 잠시 뒤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보민이가 학원에 안 갔단다.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밥 먹다 말고 울고 불며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며 문자를 보냈다. 엊그제 같은 반 친구와 다툼이 있었다고 큰딸이 말했었다. 아마 그 일의 연장선이었던 것 같다. 자세히는 몰라도 친구들 사이 험담이 와전되며 오해 살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학원에도 안 가겠다고 했는지 짐작해 봤다. 아마 그때 심정으로 학원에 가봐야 눈에 안 들어올게 뻔하다.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속으로 공감해 줬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큰딸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잔뜩 풀이 죽은 표정이다. 어깨를 감싸며 "괜찮니?" 한 마디만 했다. 옷을 갈아입고 옆에 앉았지만 아무 말 안 했다. 왜 그랬냐고 따지고 물어봤자 대답 안 할게 뻔하다. 놔두면 언젠가 말하겠지 싶었다. 풀이 죽은 모습이 안쓰럽긴 했지만 마음으로 공감해 주는 걸로 내 역할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두 딸에 대하는 태도에 온도차가 분명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상대방의 상황에 맞게 태도를 정했다. 둘째에게는 행동에 대한 지적을, 첫째에게는 공감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금 더 배려했다면 둘째에게도 지적대신 공감이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채윤이도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거다. 부모라면 아이의 판단을 존중해 줄 필요도 있다. 오히려 공감해 주었다면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했을 수 있다. 결국 두 딸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 차이 때문에 둘째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게 한 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자기들을 편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단지 저마다의 상황에 맞게 부모로서 선택해야 할 태도가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때가 오겠지.


두 딸이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골고루 사랑해 줘야 한다. 편애는 둘 중 한쪽에게 상처를 남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운한 감정이 쌓여 곪아 터지면 관계에도 해를 입힌다. 부모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중립을 지키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편애는 글을 쓸 때도 영향을 미친다.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쓰는 작가와 다양한 주제를 써보는 작가의 글에 깊이는 분명 다르다. 편중된 주제만 쓰는 작가의 글은 늘 비슷한 맛만 난다. 늘 쓰던 글은 쓰기 편하다. 편한 글을 계속 쓰다 보면 자신감도 붙는다. 하지만 다양한 글을 쓰는 작가는 되지 못한다. 굳이 잘 쓰는 글 대신 낯선 주제를 쓸 이유가 없어진다. 결국 편중된 글을 쓰면 생각도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반면 써보지 않은 글을 쓰려면 어렵고 불편하다. 내 글에 확신도 안 든다. 엉뚱한 글을 쓰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불편하고 불확실하고 의심이 들수록 더 공부하게 된다. 써보지 않은 글을 잘 쓰려는 공부다. 공부하면서 쓰는 글은 적어도 이전에 쓴 글보다는 나아지기 마련이다. 당연히 생각도 유연해진다. 공부가 그렇게 만든다.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게 공부의 시작이라 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기회는 열려있다. 그만큼 더 좋은 글을 쓸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자녀에게 골고루 사랑을 줄 때 화목한 가정이 되는 것처럼, 작가도 다양한 주제를 써보는 게 필력을 키운 데 도움이 된다. 편식은 건강을 해친다. 편애는 가정을 깬다. 편중은 그저 그런 작가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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