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채형복
평생 자리를 탐하였다/ 구하지 못할까/ 놓칠까, 잃을까, 빼앗길까/ 불신과 경계로 충혈된 두 눈은/ 밤잠을 잊었다// 세상에 영원한 나의 자리 있는가/ 아무리 애써도 지킬 수 없고/ 세월에, 나이에 밀려나야 하리/ 자조하듯 탄식하는 밤/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누울 자리 어디이며/ 돌아갈 자리 어디인가/ 욕망하며 서있는 이 자리는/ 누울 자리인가/ 떠날 자리인가// 미련 없다/ 욕심 없다/ 스스로 위로하며 다짐하여도/ 스멀스멀 스며드는 욕망은/ 연기처럼 폐부를 찌르리// 버리라/ 떠나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가 누울 자리는// 무욕(無慾)의 마음자리//
한 학기를 마치면 한동안 두문불출 집을 나서지 않는다. 빈둥빈둥 쉬기도, 산책도 하면서 머리를 비운다. 학기 중 바빠서 읽지 못한 책을 가득 구입하고는 몇날 며칠이고 마구잡이 읽곤 한다.
사람들은 교수란 직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한 학기에 몇 시간 강의하세요? 아홉시간? 정말 좋으시겠어요. 아홉 시간 일하고 월급 많이 받고, 여름방학, 겨울방학 있지, 늘 젊은 학생들하고 생활하니 늙지 않지.”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다고 다 맞는 말도 아니다. 아홉 시간 강의하고(게다가 로스쿨은 여섯 시간만 강의한다!), 방학이 두 번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아홉 시간만 일하고, 그에 비해 월급을 많이 받는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월급은 학교 마다, 교수 개인 마다 그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 중 가장 큰 오해는 교수들이 ‘아홉 시간만 일한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홉 시간’을 가르치기 위해 교수들이 기울이는 다른 노력은 여기에 포함시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들이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 ‘교육, 연구, 사회봉사’다. 교수도 교육자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흔히 이 교육, 즉 학생을 가르치는 것만을 ‘교수의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수들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 무척 바쁜 직업이다.
교수에게는 학자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적 목표 내지는 목적이 있다. 보통 그것은 연구와 사회봉사로 나타난다. 누구는 평생 외길 연구에 헌신하고, 다른 누구는 정치나 시민단체, 그리고 학내 보직이나 학회 활동 등 사회봉사에 복무한다. 외롭지만 연구실에서 조용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사회에 나가 바쁘게 살 것인가? 그 선택은 오롯이 교수 자신의 몫이다.
교육과 연구에 대해서는 교수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할 의무로서 ‘최소기준’이 정해져 있다. 이를테면, 법정강의시수 9시간, 승진에 필요한 연구실적 몇 백 퍼센트하는 식이다. 이에 반해 사회봉사는 달리 정해진 기준이 없다. 이것은 오로지 교수 개인의 정치적 성향 혹은 학문적 소신 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학에 따라서는 학내보직의 제안이 있을 때 거부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대학은 교수 개인의 의사를 존중한다. “평양감사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 게 보직인 셈이다.
이론적으로는 교수는 보직에 신경 쓰지 않고 개인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 학생을 가르치면 그만이다. 다른 모든 일은 ‘부수적’인 것이니 무시해도 좋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외부의 개입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바란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상 평생 지식을 추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살고자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연구실에서 공부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대학도 교수들의 직장이고,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보니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매 순간 헷갈리고 고민스럽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수인 나도 나이 들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내 자리’를 찾는 일이다. 사회관계에서 교수라는 지위에 걸 맞는 역할을 하고, 또 자신만의 자리를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아니 나이 들수록 교수로서 ‘과연 내 자리는 어디인가?’ 묻는 일이 잦아지고, 또 ‘내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되묻는 시간이 많다.
“나아가도 죽고, 물러나도 죽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도 죽는다. 너의 선택은 무엇인가?”
마치 미궁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직장과 대인관계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그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일반 직장과는 달리 대학에 있다는 이유로 교수에게는 일반인이나 가족, 그리고 지인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내가 어떤 학문적인 주제를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별다른 관심도 없다. 다만 ‘교수’로서 일정한 역할을 해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그게 현실적인 역할을 말하는지, 아니면 대의적인 역할을 말하는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들이 ‘교수인 나’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세상의 통념에서 벗어난 생각과 행동을 하는 나에 대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도 서서히 중견교수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다. 그만큼 ‘내가 설 자리’에 대한 고민도 깊다. 소장학자일 때는 오히려 학문적 가치관도, 인생관도, 또 미래의 목표도 분명했다. 그 때에 비해 분명 지식과 경험도, 또 삶의 지혜도 깊어졌건만 오히려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하고, 의견을 밝혀야 할 때마다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삶이나 학문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면 내심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당황하기 일쑤다. 습관처럼 공부하고 가르치는 타성에 젖어있는 탓일까? 누가 나에게, “당신은 어떤 모습의 미래를 기대하고, 욕망하며,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물으면 자신 있게 말할 용기가 없다.
이런 상황이니 사춘기 때 방황하듯 나와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깨달음 하나.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어느 순간 불현 듯 다가오기도 하지만 연륜과 세월을 더하면서 온 몸으로 부딪히며 체득하게 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중년의 나이가 주는 연륜을 통해 ‘숙명적으로’ 깨닫고, 또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사실은 절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나이와 늙음 앞에 지위와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던가.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주름과 흰머리를 보며 ‘나이’를 확인한다. 그 확인이 일상으로 자리 잡을 때 중년은 삶을 체념하고 수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삶이란 길고긴 골목을 돌고 돌아 중년에 이른 나는 이제 허전하고 쓸쓸한 삶의 뒤안길을 보았다고나 할까? 시원섭섭하다. 하지만 그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중년은 자신의 자리(=내 자리 혹은 나의 자리)를 찾는 나이다. 중견교수의 초입에 들어선 나는 그 자리를 제때에, 그리고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나이와 사회적 지위가 안겨주는 중압감에 눌려 덜덜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훗날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나 역시 세상에서 잊혀 먼지처럼 허공으로 흩날려 사라지리라.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지금 이 순간 가슴에 새겨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버리라, 떠나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가 누울 자리는 무욕(無慾)의 마음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