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은/ 그저/ 말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입말을 끊고/ 소리의 경계를 넘어선/ 득음
세상을 버리고/ 내면의 자유를 향한/ 투쟁
단절된/ 자신과의/ 대화
나는 누구인가/ 성찰이 필요할 때/ 묵언한다 (졸시 <묵언> 전문, 「묵언」중에서)
방학 때가 되면 스스로 세상을 떠나 자신을 한동안 ‘유폐’(幽閉)시키곤 한다.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연락도 차단한 채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학자란 늘 외롭고 고적하다. 평생 외로움을 친구삼지 않고는 오롯이 학자의 길을 걸어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교수라는 직업만큼 좋은 게 어디 있나요? 늘 젊은 학생들과 같이 있으니 늙지 않지요. 방학이 기니 시간적 여유도 많지요. 게다가 일주일에 아홉 시간만 가르치는데 반해 월급도 많지요. 세상 어디에 그만한 직업 있나요.”
이 말이 꼭 틀린 것도, 그렇다고 다 맞는 것도 아니다. 흔히 교수의 세 가지 의무로 ‘교육, 연구 및 사회봉사(혹은 참여)’를 든다. 이 사회의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 가지 의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물론 교육부의 정책이나 사회여론에 따라 그 우선순위가 다소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여부를 떠나 ‘교육자적 소신 혹은 철학’에 따라 그 기대수준을 너무 높게 정해두면, 이제는 이 세 가지 의무가 자신을 심하게 압박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게다가 소위 ‘자기인정욕구’라고 할까? 교수란 자존감이 아주 강한 부류라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여간 높지 않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나름대로 고도의 지적 훈련을 받은 교수도 사람인 이상 더러 교만의 함정에 빠져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지곤 한다. 그 주된 이유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오판한 까닭이다. 교수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별로 자신과 이해관계도 없거나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괜히 참견한다. 쓸데없이 말도 많아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반대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과 에너지를 고갈시켜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그만!’ 딱 그 시점에서 멈춰야 하는데, 얼기설기 얽힌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때 내가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현실에서 ‘삼십육계-도망치는 것’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서 ‘유폐시키는 것’이다.
현실의 삶을 살다보면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다잡아도 온갖 욕망과 유혹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남들보다 연구실적도 더 내고 싶고, 어떤 일을 맡아 남보란 듯이 능력도 발휘하고 싶다. 얼기설기 인간관계에 얽혀 들고, 세속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늘 하늘만 보고 치달리다 보니 날로 교만한 마음이 생겨 지혜의 눈을 가로막고 만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현실에서 도망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럴 때는 보따리를 사들고 집으로 숨어든다.
그 날부터 ‘묵언’이 시작된다. 하기야 말을 하려고 해도 상대가 없다. 아내와 아들이 있어도 가족과 학문적 담론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평소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산책하고, 영화를 보면서 빈둥빈둥 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래도 돼?”란 의무감 내지는 사명감이 생긴다. 내면에 잠재해 있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거대 담론’을 꺼내기도, ‘법적 정의란 무엇일까?’란 해묵은 주제를 곱씹어보기도 한다. 괜히 마음이 우울하고 심각해지기도 한다. ‘학자로서의 병’이 도지는 것이다. 이런 심리상태는 다시 공부할 때가 되었다는 징표다. 다시 집과 연구실을 오가며 책이나 논문을 쓴다.
지금 나는 ‘묵언’ 중이다. 말을 끊고 자신과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이나 기공을 한다. 어슬렁거리며 걸으며 보선(步禪)을 하기도, 소파에 편히 누워 와선(臥禪)을 하기도 한다. 뇌리를 떠도는 수많은 상념과 번뇌를 버리고 고요하고 천천히 호흡을 한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다. 나 자신과 대화하고 소통한다. 나를 통해 세상을, 세상을 통해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본다.
겨울은 학자에게 ‘인동’(忍冬)의 계절이다. 번잡한 일상을 떠나 오로지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다. 혹독한 추위로 온 세상이 얼어붙어버린 ‘인동의 계절’, 밖으로 드러내기를 멈추고 안으로 깊이 내려앉는다. 우리가 새 봄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음은 ‘인동의 계절’ 겨울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 겨울은 ‘묵언의 계절’이기에 새 봄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