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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복 Jun 21. 2020

[채형복의 텃밭농사 이야기·1]

나는 왜 텃밭농사를 짓는가?-2


세 번째 이유는 자주·자립적 삶을 살고자 함이다. 도시생활은 외부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의 전형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돈을 주고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해도 천재지변이나 이상기후 등으로 외부에서 물자의 공급이 끊기는 경우 도시는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전기나 수도의 공급이 중단되면 어떨까? 냉난방이 끊기고, 용변도 내리지 못한 변기는 오폐수로 차오를 것이다. 이처럼 대단위 아파트 중심의 공동주거형태는 편리하고 편안하지만 최악의 현실상황이 도래하는 경우에는 한순간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 당장 생활쓰레기가 제대로 수거되지 않아도 도시에는 온갖 악취와 벌레들이 들끓는 사례를 보고 듣고 있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보면, 도시민들이 누리는 평화는 돈을 주고 산 것이며, 외부 의존적 내지는 기생적(奇生的)이다.


나는 내 손으로 작물을 가꾸어 먹으며 이런 더부살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평소 나는 자신의 삶의 주체이자 주인으로서 개인의 절대자유를 주창해왔다. 그 자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타인이나 사회, 나아가 국가체제에 되도록 기대거나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얽어매는 돈(자본)에서도 자립하여 자주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만물이 서로 돕고 살기 위해서는 먼저 개체(혹은 개인)와 집단은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주체여야 한다. 그런 주체로서 서로의 관계가 대등하게 재설정되지 않고는 절대자유는 보장될 수 없다. 전원생활을 하며 텃밭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평소의 소신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삶을 모색해보고 싶었다.


6-70평 남짓 텃밭은 우리 가족이 자주·자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충분할 만큼 넉넉한 채소를 공급해주고 있다. 넘치는 채소는 거두어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니 텃밭이 베푸는 자비심과 공덕은 한량없다. 텃밭을 가꾸면서 생활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죽도록 가기 싫어하는 대형마트에 가지 않아도 되니 돈과 시간도 절약되고 스트레스도 없다. 내가 원하는 농법으로 신선하고 맛있는 채소를 기르니 매끼 식사를 할 때마다 행복하다. 더 이상 맛이 있니 없니 농약범벅일까 아닐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절로 몸과 마음이 숙연해져 땅에게 감사의 기도를 하며 음식을 먹는다. 내 손으로 직접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어 먹으면서 나는 비로소 남에게 기대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실증하고 있다.


내가 텃밭농사를 짓는 마지막 이유는 자연친화적 및 생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도시에서 이런 삶을 누리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시구조는 기계적·획일적이며 지나치게 기능적이다. 만일 도시가 자연환경과 더불어 설계되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원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환경이었다면 나는 도시를 떠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여러 대학을 거쳐 다시 고향 대구에 자리를 잡았을 때 고산시지지역에 정착한 이유는 단 하나. 아파트 주변에 산과 들이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개구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었고, 코끝에 닿는 은은하고 그윽한 포도향에 절로 취했다. 하지만 그 행복한 순간도 잠시, 대구수성의료지구로 지정되더니 우후죽순 아파트와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불도저를 비롯한 각종 중기계와 차량이 내뿜는 소음으로 내 일상은 평온치 못했다. 나는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어렵사리 땅을 사고 집을 지으면서 나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덥히는 황토온돌방과 텃밭 두 가지를 고집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아궁이와 텃밭이 사라진 도시와 농촌의 가옥구조에 대해 늘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빼고 아파트형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대형가스통을 설치하여 난방을 하면 전원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아궁이를 만든 이유는 온돌의 우수성과 효용성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늘 추웠다. 아내는 그때 얻은 알레르기 비염으로 여태껏 고생하고 있다. 가난한 유학생과 결혼하여 고생한 아내를 위한 최소한의 보답이랄까? 다소 귀찮고 성가시지만 나는 여름을 제외한 계절 내내 매일 묵묵히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다.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니 무엇을 뭘 어떻게 먹을까는 생존의 문제로서 늘 고민스럽다. 대구의 음식은 짜고 매운 맛이 강하여 상당히 자극적이다. 거기에 엠에스지(MSG)까지 더하니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면 온종일 혀끝에 화학조미료의 맛이 배여 있어 뒤끝이 영 찜찜했다. 천연의 재료로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을까? 오래 전부터 고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텃밭농사를 짓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농사를 짓되 음식물로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리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전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 채소를 거두면 그 다음은 아내의 몫이다. 아내는 그 채소로 정성껏 음식을 만든다. 아내는 집에서 손수 담근 된장과 고추장 등 양념을 하고 일체의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다. 재료를 익히고 볶더라도 최소한의 인위적 가공을 할뿐 되도록 식재료가 가진 고유의 맛을 변형시키지 않는 것이다.


자연친화적 및 생태적인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에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인간의 삶은 지속되어야 하고, 존재로서 가지는 존엄성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문명과 문화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남는 과제는 자연과 생태에 보다 덜 위협적이고, 침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생활방식을 찾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나는 전원생활과 텃밭농사를 선택했다.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다. 죽을 때는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하는 삶이고, 인간은 결국 자연에 묻히고 그 일부가 되어 썩어 사라지는 존재다. 전원에 살며 텃밭을 가꾸면서 나는 어쩌면 삶도 죽음도 없는 불생불사를 꿈꾸는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궁이 앞에서/ 채형복


매일 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얼기설기 쌓은 참나무 장작 위에


속진에 찌들어 바싹 마른 몸뚱이 누이고는

홀로 다비식을 치른다


전생부터 굶주렸나

불길은 성난 맹수로 달려와 순식간에 먹잇감을 삼킨다


악마의 혀 같은 불이여,


욕망으로 웃자라난 무명초 머리칼을 한 올  

터럭 하나 남김없이 말끔하게 태워버려라


(이제 나는 깨달을 수 있겠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리라, 꼿꼿이 세운 허리를 동강내어

마디마디 분질러 꺾어버려라


(이제 나는 편히 쉴 수 있겠지)


거화炬火!

스님, 불 들어가요 어서 나오세요


불에 타다 만 금이빨 두 개

잿더미 속에서 반짝이고 있네요


화두는 놓지 마세요

연기에 그을린 볼품없는 사리는 줍지 않을게요


아궁이 밖 세상의 번뇌는

아직도 활활 불타고 있으니


이 불 꺼져 한 줌 재로 남은 속정俗情

바람에 흩날려 허공으로 사라지기 전에는


스님, 죽어도 죽지 말고

깨달아도 성불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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