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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공 Aug 18. 2020

죽은 자를 위한 저승의 안내서

《티베트 사자의 서》

삶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 이 책은 죽음의 진리를 일깨운다. 이 책은 결코 종교적 믿음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의식을 가진 채로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뒤 다시 육체로 돌아온 위대한 영적 스승들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 에반스 웬츠, 《티베트 사자의 서》 서문 중에서    

 

사기꾼, 성범죄자, 독립투사, 성직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단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에게도 죽음은 한 번뿐이다. 모두의 죽음은 1회로 동등하다. 하지만 만약 윤회가 존재한다면?      


불교와 힌두교 등 일부 동양 종교에서는 인간과 동물 등 생명을 가진 존재가 모두 끊임없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세계에 있다고 본다. 만약 윤회와 환생을 믿는다면 죽음 이후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따라서 웬츠의 말처럼 삶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한 뒤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칼 융(Carl Jung)은 1927년 영역판으로 발간된 《티베트 사자의 서》에 이런 서평을 남겼다. “책이 세상에 나온 이래 수년 동안 이 책은 언제나 나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수많은 생각과 영감, 그리고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한다.” 융은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심리학의 선구자다. 인간의 심리란 여러 층이 겹쳐진 복합체라는 ‘콤플렉스’ 이론을 창시했고 인간이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나뉜다는 유형론을 제시했다. 특히 성격유형 검사로 많이 활용되고 있는 MBTI가 융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고안되었다. 한마디로 융은 현대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심리학의 거장이다. 이런 거장이 스스로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융의 서평은 《티베트 사자의 서》가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학문적으로도 논의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티베트 사자의 서》의 원제는 《바르도 퇴돌(Bardo-Thodol)》이다. 바르도(Bardo)는 ‘둘(do) 사이(bar)’란 뜻으로 낮과 밤의 사이, 다시 말해 죽음 이후 환생하기 전의 기간, 바로 ‘사후세계’를 말한다. 퇴돌(Thodol)은 ‘듣는(thos) 것으로 해탈(grol)에 이른다’는 의미다. 따라서 《바르도 퇴돌》은 ‘사후세계에서 듣는 것으로 해탈에 이르는 책’이란 뜻이다.      


20세기 초, 옥스퍼드대 종교학과 교수였던 에반스 웬츠(Evans Wentz)는 인도 북서부 다르질링에서 《티베트 사자의 서》 필사본을 발견했다. 그는 수년간의 연구 끝에 8세기경 파드마 삼바바(Padma Sambhava)란 성인이 책을 저술했음을 밝혀냈다. 이후 웬츠는 1927년 원본을 영어로 번역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를 출간했다. 책은 발간되자마자 불붙은 듯 팔려나갔으며 1938년 스위스 초판본에는 융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서평을 달았다. 이후에도 《티베트 사자의 서》는 판을 거듭하며 서구에 널리 퍼졌다.     

 

한국의 사찰에서는 보통 누군가 죽으면 49재를 치른다. 49재는 49일 동안 망자를 위해 재(齋)를 올리는 종교적 의식이다. 간단히 말하면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인간이 사망한 뒤 49일 동안 일어나는 일을 기록한 책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윤회의 세계 안에는 7가지의 세계가 있고 각각의 세계에는 7단계의 진화 등급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세계의 등급을 합치면 49단계인 것이다.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성장할 때는 아메바 형태부터 영장류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생물의 모든 형태를 거쳐 진화하면서 인간의 형상을 갖춘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이 죽어서 사후세계로 들어가면 다음 생을 받기 전 49일 동안 정신적인 진화 단계를 경험한다. 즉 태아일 때는 육신의 영역에서, 사후세계에서는 정신의 영역에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죽은 이는 사후 49일간 세 가지 바르도(사후세계)를 경험한다. 첫 번째는 사망 직후부터 4일간 경험하는 ‘치카이 바르도(Hchikhahi Bardo)’, 두 번째는 5일부터 18일까지 겪는 ‘초에니 바르도(Chösnyid Bardo)’, 마지막은 19일부터 49일까지 경험하는 ‘시드파 바르도(Sridpahi Bardo)’다. 각각 ‘죽음의 순간 경험하는 사후세계’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사후세계’ ‘환생의 길을 찾는 사후세계’를 뜻한다. 그렇다면 《티베트 사자의 서》에는 우리가 사후에 어떤 일을 체험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세 가지의 사후세계에서 49일간 일어나는 일을 간략히 묘사하면 이렇다.



죽음 직후의 첫 번째 사후세계(치카이 바르도)

- 첫 번째 날부터 네 번째 날     


죽음의 순간에는 투명한 빛이 나타난다. 생전에 진리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수행한 사람은 투명한 빛에 인도되어 공중에 일직선으로 난 큰길을 따라 태어남이 없는 근원의 세계로 곧바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최초의 투명한 빛을 알아채지 못하면 두 번째 투명한 빛이 사자(死者) 앞에 나타난다. 이는 호흡이 완전히 정지되고 한 식경(30분)쯤 지난 뒤에 일어난다. 사자가 살아 있을 때 얼마나 좋은 카르마(業, 행위)를 지었는지에 따라 빛이 지속되는 시간이 결정된다.     

 

생명이 끊기고 의식체가 몸 밖으로 나오면 사자는 “내가 죽은 건가, 살아 있는 건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생사를 분간하지 못한다. 아직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 지은 카르마가 만들어내는 공포의 환영은 아직 나타나기 전이다.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두 번째 사후세계(초에니 바르도)

- 다섯 번째 날부터 열한 번째 날     

 

첫 번째 바르도에서 투명한 빛을 알아보지 못한 자에게는 두 번째 바르도가 밝아온다. 이 단계에서는 살아 있을 때 쌓았던 카르마가 만들어내는 환영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사자는 자신이 옷이 수의로 갈아입혀지고 음식물이 차려진 광경을 보게 된다. 가족과 친구들이 슬퍼하며 우는 소리도 듣는다. 사자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다고 외치지만 그들은 사자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사자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문득 빛 한가운데에서 천 개의 천둥이 동시에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는 자신의 참 자아에서 나오는 소리다. 그러나 진리의 빛과 소리를 알아채지 못하면 사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49일을 사후세계에서 보내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모두 빛의 몸을 하고 있다. 짙은 푸른색이 발하는 빛, 흰색으로 발하는 빛은 진리의 세계에서 나오는 붓다와 지혜의 빛이다. 어두운 회색은 지옥에서 나오는 빛이다. 생전에 자주 분노하는 마음을 내면 나쁜 카르마의 힘이 쌓이고, 이 힘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회색빛을 좋아하게 만든다. 밝은 노란색, 붉은색, 초록색으로 발하는 빛이 붓다와 진리의 세계에서 나온 빛이다. 이 빛을 따라가면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자유의 길에 이른다.      


어두운 붉은색은 불행한 귀신들의 세계인 아귀계로부터 나온 빛이다. 만약 생전에 강한 탐심을 내었다면 이 빛을 좋아할 것이다. 이 빛을 따라가면 갈증과 굶주림에 고통받는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만약 생전에 질투를 자주 했다면 어두운 초록색 빛에 이끌릴 것이다. 이는 아수라의 세계에서 나오는 빛이다. 이 빛을 따라가면 전쟁, 다툼, 살육에 고통받는 세계에 태어난다. 또 어두운 푸른색 빛에 이끌린다면 동물의 세계에 떨어져 수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열두 번째 날부터 열여덟 번째 날     


이제 머리가 셋이며 여섯 개의 손과 네 개의 다리를 사진 분노의 신이 나타난다. 몸에서 화염을 내뿜고 눈을 부릅뜬 채 사자를 노려볼 것이다. 해골 그릇과 도끼를 들고 피로 가득한 붉은 조개껍질 그릇을 마시는 신, 오른손에는 인간의 시체를 들고 왼손에 피가 가득한 해골 그릇을 든 신, 오른손에 창자를 들고 왼손으로는 그것을 입에 집어넣고 있는 신, 시체에서 머리를 떼어내 먹고 있는 신도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분노의 신이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타난다. 두 눈을 수정알처럼 번뜩이고 손에는 사자의 카르마가 기록된 판을 들고 “매우 쳐라! 죽여라!” 하고 고함을 칠 것이다.      


그러나 사자의 몸은 카르마의 성향만을 지닌 정신체이기 때문에 베이거나 잘려도 죽지 않는다. 공포스러운 형상은 모두 사자의 마음에서 나타난 환영이다. 지금 이 신들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곧 겁에 질려 정신을 잃게 된다.      


환생의 길을 찾는 세 번째 사후세계(시드파 바르도)

-열아홉 번째 날부터 마흔아홉 번째 날     


두 번째 사후세계에서는 진리를 잘 알거나 착한 카르마를 쌓은 이들만이 영원한 자유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생전에 악한 카르마를 쌓거나 진리에 어두운 자는 세 번째 사후세계로 내려와 방황한다.      

만일 사자가 천상계의 신으로 태어나려 하면 천상세계의 환영이, 인간계, 아수라, 축생계, 아귀계, 지옥에 태어나려고 하면 그곳의 환영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환영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만약 환영을 따라가면 윤회의 세계에 떨어져 방황하며 고통을 겪게 된다. 지금이라도 붓다와 진리, 성인들을 명상해야 대자유에 이를 수 있다.


사자는 지금 모든 감각 기능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생전에 불구였을지라도 사후세계에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회복된다. 사후세계에서의 몸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바위, 산, 흙, 집까지 거침없이 통과할 수 있다. 모체의 자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통과한다.

      

육체를 떠나 사후세계의 몸을 가진 자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이 익숙하던 장소와 가족을 마치 꿈속에서 보듯이 보게 된다. 그들은 사자의 제사를 올리며 운다. 사자가 “나 여기 있으니 울지 마시오”라고 말해도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잠시 후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사나운 바람이 뒤에서 앞으로 사자를 내몬다. 온갖 귀신과 맹수가 쫓아오고 눈, 비, 세찬 돌풍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는 모두 생전에 지은 카르마가 만들어내는 형상이다.     

 

간혹 다리 위나 절, 탑 옆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종종 의식이 흐려지고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사후세계에서는 친구도 없다. 이때의 모든 괴로움은 생전에 쌓은 카르마에 달려 있다.      


잠시 뒤 선한 수호신이 와서 생전에 행한 선행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동시에 악한 신이 와서 생전에 행한 악행을 하나하나 헤아릴 것이다. 만약 겁에 질려 “나는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하고 거짓말을 하면 카르마의 거울이 진실을 비춘다. 분노한 죽음의 왕은 사자의 목을 밧줄에 걸어 끌고 다니며 심장을 도려내고 피를 마실 것이다. 그러나 사자는 죽을 수 없다. 몸이 마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환상이다.  

    

정신을 읽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여러 색깔의 빛이 주위를 비출 것이다. 어두운 흰색은 천상계에서 오는 빛이고, 어두운 초록색은 거인신들이 사는 아수라계의 빛이다. 어두운 노란색은 인간 세상에서 오는 빛이고, 어두운 푸른색은 동물계에서 오는 빛이며, 어두운 붉은색은 불행한 귀신이 사는 아귀계의 빛이고, 회색은 지옥계에서 오는 빛이다. 이때 사자의 몸은 카르마의 힘에 의해 장차 태어날 장소와 닮은 빛을 띤다.      


진리에 대한 믿음과 명상의 힘이 약한 자는 사후세계의 환영에 압도당해 자궁의 입구를 찾아 방황하게 된다. 만약 자궁문이 닫히면 영원한 자유에 이를 테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자궁문을 닫지 못하고 결국 자궁문을 선택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제 곧 사자가 태어날 장소의 징조와 특징이 나타난다. 천상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보석으로 치장된 사원이나 저택이 보이고, 아수라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멋진 숲이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불꽃이 보인다. 만일 짐승들 사이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바위굴과 안개가 나타나고, 아귀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평원과 낮은 동굴과 밀림 사이의 빈터, 폐허가 된 숲이 보인다. 만일 지옥으로 태어날 운명이라면 울부짖는 노래 소리와 함께 음침한 대지와 흑백의 건물, 땅 위에 난 검은 구멍, 그리고 검은 길이 나타난다.



짧게 요약했지만 《티베트 사자의 서》의 분량은 꽤 많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를 다룬다. 첫째는 죽음 이후 인간이 체험하게 될 내용에 대한 안내이며, 둘째는 사자에 대한 인도다. 사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본래 독서를 위한 일반적인 서적이 아니다. 이 책은 49일 동안 종교적 의례를 치르면서 사자를 위해 읽는 의례집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그렇게 큰 인기를 얻었을까?      


책에서는 사자가 겪게 될 공포를 묘사하거나 내생에 태어날 불행한 장소를 설명한 뒤 살아 있을 때 선행을 하거나 명상을 닦거나 진리를 추구한 자는 그것이 환영임을 알아챌 힘이 있다고 거듭해서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살아 있을 때’란 표현이다.     


모든 일의 결과가 우연이나 행운에서 비롯되지만은 않는다. 반드시 그 일이 벌어지기 전의 ‘시작’과 ‘과정’이 있고, 그 흐름이 이어져 결과를 만들어낸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생전에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한 사람들은 사후에 좋은 세계로 갈 수 있는 운을 얻지 못한다. 사후 대자유에 이르거나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결과에 이르기 위한 전제조건은 생전의 선행, 명상, 진리에 대한 탐구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결국 사자를 위한 책이면서도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하는 행위가 소중함을 알리는 책인 셈이다.


불교 경전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갖는 마지막 생각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한다. 사실 지독한 고통이 온몸을 지배하는 순간,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축구나 육상경기처럼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스포츠를 떠올려보자. 선수가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뽑아내는 힘은 바로 경기에 참여하기 ‘전’의 훈련에서 나온다. 죽음을 맞이할 때 할 수 있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에 다다르기 ‘전’ 삶에서의 노력과 경험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강렬한 의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단순히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해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티베트 사자의 서》가 말하는 참 의미는 아니다. 다음 생이 있고 없고를 떠나,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죽는다. 이것은 지극한 사실이다. 우리가 모두 맞이할 죽음이 끝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이 과정, 즉 살아 있을 때의 순간을 어떤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걸까?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온 사람과 이번 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과 마지막 생각은 분명 똑같지 않을 것이다. 후회 없는 죽음, 인간다운 죽음, 편안한 죽음이라는 끝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과정, 바로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지금 하는 행동’의 선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모든 일의 결과와 원인은 마치 시작과 끝을 선으로 연결한 것과 같다. 태어남이라는 시작점에서 출발해 죽음이라는 끝점을 온전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탄생과 죽음을 잇는 ‘살아 있는 지금’이라는 ‘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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