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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공 Aug 05. 2020

죽음과 고난을 마주하는 태도

우리 삶에는 여러 고난이 있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잊히고 마는 고난도 있겠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키 힘든 고난도 있을 것이다.      


지난 2003년 한 방송에서 시각장애인 아빠가 육아를 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아빠는 선천성 백내장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청각과 촉각에 의지해 아내 없이 홀로 자식을 보살폈다.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탈 때는 분유 가루를 흘리기 일쑤였고, 목욕을 시킬 때도 서툴러 아이는 매번 울었다. 장애가 있어서 좋은 직업을 갖기 힘들었던 듯 썰렁한 방 안에는 변변찮은 장난감도 없었다. PD와 인터뷰하면서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내 눈을 고쳐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건 모르겠고 우리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 그래요.” 아빠는 아이를 안은 채 아이 손을 자기 얼굴에 갖다 대며 울었다. “애한테 너무 미안해요. 내 못난 걸 닮게 해서요.” 아이 또한 아빠처럼 선천적 장애로 인해 세상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각장애인 아빠와 아들은 서로의 소리와 촉감에만 의지한 채 뚜벅뚜벅 세상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맹인 아빠 육아일기 16년 후〉라는 방송에서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많은 이의 후원 덕분에 다행히 아들은 인공수정체 삽입 수술을 받아 오른쪽 시력을 되찾았고 여느 청소년들과 다름없이 잘 자랐다. 화면은 아들이 받은 장학증서와 학력 우수상 등 아들이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로 가득했다. 

방송에서 아빠와 아들은 나란히 앉아 16년 전의 영상을 함께 보았다. 아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아빠가 자신을 따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비행기를 태워주며 놀아주는 모습, 자신이 눈 수술을 하러 들어가기 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아들의 보이지 않는 왼쪽 눈에서 눈물이 스며 나왔다. 담당 PD가 “아버님, 아드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제야 아빠는 “다 커놓고 왜 울어”라 말하며 어깨를 다독였다. 

방송 말미에서 아들은 이렇게 고백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도움을 받은 만큼 남에게 갚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어요. 저도 이렇게 도움을 받은 만큼 저보다 더 힘든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과연 시각장애인 아빠와 아들의 삶에서 장애라는 고난은 어떤 의미였을까. 



짐작했겠지만 죽음이라는 것도 우리가 겪는 고난의 하나다. 퀴블러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실감하게 되면 다섯 가지 심리 단계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먼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다음으로 살아 있는 자들 혹은 신에 대해 ‘분노’한다. 그리고 수명 연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의료진이나 신 같은 존재에 의지하는 ‘타협’의 태도를 드러내며, 어떤 방법을 써도 자신을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지며, 마지막으로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상태에 이른다.      


여기서 심리학자 폴 웅(Paul Wong)은 퀴블러로스가 말한 ‘수용’이 심리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대해 덜 불안해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좋은 태도가 아니라 편안하거나 익숙한 것처럼 잘 받아들이는 태도가 건강한 심리상태라는 것이다.      


폴 웅에 따르면 인간이 죽음을 마주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죽음을 ‘도피적으로 수용(escape acceptance)’하는 태도다. 삶이 괴롭고 비참할 때, 어떠한 탈출구도 보이지 않을 때 죽음을 해결책으로 삼는 식이다. 특히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에게서 죽음에 대한 도피적 수용의 태도가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삶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클 것이다. 


최근 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여자 선수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수년간 소속팀의 감독, 팀닥터, 선배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을 당해왔지만 모두 그녀를 외면했다. 관련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해도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가해자들에게 도리어 신고 사실을 알리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녀가 자살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가해자들을 처벌하고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 괴로움을 멈출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죽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삶이 고통스럽고 어떠한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경우 죽음은 마지막 남은 수단이 된다. 죽음을 도피적 수단으로 마주하는 태도는 죽음을 긍정하거나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삶을 부정하는 것이며, 살아가기가 죽기보다 더 싫은 경우인 것이다. 


두 번째 태도는 죽음을 ‘근접적으로 수용(approach acceptance)’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변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다. 근접적 수용의 대표적인 예로는 천국처럼 ‘죽음 이후의 삶은 행복한 세상’일 것이라는 믿음을 꼽을 수 있다.   

   

내세의 낙원에 대한 믿음은 거의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 이슬람교에서 천국은 ‘쟌냐(janna, 낙원)’로 불린다. 현세에서 신을 철저히 믿고 선행을 행한 사람들은 사후에 쟌냐에 태어난다. 이슬람 성서 《코란》에는 낙원에 대한 묘사가 전해진다. 쟌냐에 태어난 사람들은 끝없이 맑고 투명한 물이 솟아나는 샘 주위의 푸른 나무 그늘에 누워 아름다운 여인들의 시중을 받는다. 그리고 이 낙원에서 온갖 종류의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음껏 마시며 영원히 어떠한 근심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잘 알고 있듯이 기독교에서 천국은 ‘에덴동산’ 혹은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표현되는데 <요한계시록>에 이 새로운 예루살렘에 관한 내용이 있다. 생전에 신에 대한 올바른 신앙심을 가진 사람과 바르게 산 자들이 가게 되는 이상의 도시인 이곳에는 12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순금으로 만들어진 마을이 있다. 12개의 진주로 만들어진 문과 하나님의 옥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있고, 강의 양편에는 달마다 12종의 열매가 맺힌다.     


불교에도 물론 천국과 유사한 세계인 ‘극락(極樂)’이 있다. 극락은 말 그대로 ‘더없는(極)’ ‘즐거움(樂)’의 세계다. 생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사후에 여러 불보살이 사자(死者)를 맞이하러 오고, 사자는 극락세계의 연꽃 속에서 환생한다. 극락세계의 나무에는 온갖 종류의 보석이 달려 있고 바람이 불면 보석들이 부딪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새가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소리는 붓다의 법문이다. 땅은 푹신하며 음식과 화장실 등은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하면 눈앞에 나타난다. 이곳 극락에 한번 태어나면 다시는 인간계나 지옥으로 환생하지 않는다.      


이렇듯 죽음에 대한 근접적 수용의 태도에는 죽음은 끝이 아니며 사후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죽음은 괴로운 현실과 행복한 내세를 연결하는 ‘문’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중립적으로 수용(neutral acceptance)’하는 태도가 있다. 중립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립적 수용의 태도는 죽음을 도피 수단이나 현실을 초월하는 이상세계의 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환영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탄생, 삶 같은 자연의 동등한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죽음에 대한 중립적 수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군종으로 군 복무를 할 때 종종 부대 인근의 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군종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상담인데, 나는 부대 근처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말기 환자들과 상담을 했다. 말이 상담이지 당시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고 인생 경험이나 공부도 부족한 터라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종교적 구절을 말씀드릴 뿐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특히 파킨슨병 환자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파킨슨병은 초기에는 근육이 떨리는 것으로 시작해 말기에는 근육과 관절이 경직되어 혼자 침대에서 돌아누울 수조차 없게 된다. 환자들 옆에는 큼지막한 인형이나 베개가 놓여 있었는데 침대에서 혼자 돌아눕지 못하다 보니 욕창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중 유달리 피부색이 뽀얗고 눈빛이 초롱초롱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병이 많이 진행되어 하반신을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내가 다른 환자들에게 하던 대로 얼마나 힘드시냐고, 곧 좋아지실 거라고 위로를 건네자 할머니는 환자가 내는 목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밝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제까지 자식들도 다 잘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냈고 손주도 봤어요. 여한이 없네요.”      


내 경험상 죽음을 앞둔 사람이 ‘이제 여한이 없다’란 말을 할 때 대개는 진심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어떨 때는 한이 더 많다는 마음속 생각을 반증하기도 한다. 나는 할머니 또한 상투적으로 내뱉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정말 달랐다. “나는 내 병이 안 나을 거란 걸 알아요. 그리고 평소에 기도를 열심히 한 덕분인지 병원에 누워서도 기도하면 마음이 편해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근데 젊은 분이 군에 있기 참 힘들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갇혀 있으니.” 할머니는 마치 손주를 보는 듯한 인자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가봐요.” 


몸이 점점 마비되어 움직일 수도 없고, 그 누구보다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할머니는 나를 위로했다. 할머니의 차분한 목소리와 따듯한 눈빛을 마주한 나는 그 말씀이 진심에서 우러나왔음을 느꼈다. 그 후에도 몇 번 호스피스 병동에 방문했지만 할머니와 대화하기는 힘들었다. 옅은 미소만 머금은 채 한사코 내 인사를 거절하며 어서 다른 분들에게 가보라고 손짓했기 때문이다. 오다가다 멀찍이서 볼 때면 할머니는 매번 안온한 표정으로 다른 환자들과 대화하고 있었고, 불안해하거나 동요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나보다는 할머니가 상담사에 어울렸던 것 같다. 내가 이제까지 본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이었으니까. 



이와 같이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인간과 생명에게 필연적 사실로서 죽음을 마주하게 한다.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삶의 유한성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삶의 시간이 한정되었음을 자각시켜, 삶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개시(開示)’해준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지극한 사실, 즉 인간의 필멸성을 ‘인정’하면 죽음이 비추고 있던 불안과 공포로 향한 조명은 우리의 남은 삶을 비추게 된다.      


앞서 소개한 시각장애인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만약 장애가 없었다면 그들이 분명 더 행복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아들이 지금 같은 애틋하고 지극한 사랑을 키울 수 있었을까. 만약 아들이 평범하게 자랐다면 남에게 받은 만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맹세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 고난은 단순히 고통만을 의미했을까.      


죽음과 삶의 고난은 피하거나 포장하거나 감추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맨손으로 만지고 맨몸으로 받아냈을 때,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던 삶의 가치를 일깨워줄 스승이자 마중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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