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 사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병으로 인한 사망인 ‘병사’이고, 둘째는 외부의 원인으로 인한 사망인 ‘외인사’다. 병사의 원인은 암, 심장과 폐 및 뇌혈관 질환, 당뇨, 고혈압 등 종류가 다양하다. 병으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수명이 자연스럽게 다해 죽기 때문에 자연사의 영역에 속해 있다. 반면에 외인사는 자살, 타살, 사고사 등 주어진 수명을 다 쓰지 못하고 가버리는 경우로, 대개 안타깝거나 비참한 경우가 많다.
통계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자연사한다. 그리고 다수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병원에서 곧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를 심각한 환자를 다루는 곳은 중환자실이다. 중환자실은 중증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특수한 병실이다. 인공호흡기나 모니터링 기계가 2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가동된다. 그래서일까. 중환자실에 면회를 가면 누구나 불안하고 두려워진다.
끊임없이 울리는 기계의 경고음 소리 속에서 입에 관을 문 채 초점이 풀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환자들이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황급해 보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삐 쏘다닌다.
물론 중환자실에 있다고 해서 모두 곧 죽는 것은 아니다. 병세가 좋아져 일반 병실로 옮기거나 퇴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장례식장을 제외하고는 병원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중환자실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중환자실은 생명과 직접 맞닿은 곳이기도 하다. 중환자실에서 이루어지는 소생술, 즉 환자가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하는 의학적 조치는 그의 몸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와 더불어 연명치료도 이루어진다. 사실상 소생술도 연명치료에 속한다. 연명치료는 병을 낫게 해서 환자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는 치료의 의미보다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의술이다. 인공호흡이 대표적인 치료법 중 하나다.
중병의 환자가 스스로 호흡할 능력이 없는 경우 환자는 자연스럽게 호흡 정지로 사망한다. 그러나 중환자실의 인공호흡기는 이를 허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환자의 수명을 연장한다. 문제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치료를 받아도 정상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다. 일단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쉰다고 해도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는 말 한마디 못하고 몇 개월간 호흡기에만 의존하다 사망할 수도 있다. 기도에 관을 삽입한 환자는 가족에게 말을 할 수 없고, 당연히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주변에 알릴 수도 없다.
작년 여름, 할머니가 대상포진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고령이라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어떤 치료로도 효과를 볼 수 없었다. 호흡이 잘 안 되니 몸 안에 산소 농도가 부족해져서 결국 돌아가시는 날까지 24시간 동안 입에 인공호흡기를 꽂은 채, 가족들에게 어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입안에 삽입된 관을 밤새 물고 있느라 얼마나 갑갑하셨을지,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말을 못 해서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상상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렵다. 내가 직접 겪기 전까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면회를 다녀온 어머니가 내게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는 오직 할머니의 눈밖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있다가 어머니가 “엄마, 나 왔어” 하면 눈을 깜빡거리셨고, “엄마, 아프지? 힘들지?”라고 말하면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아마도 할머니가 흘린 눈물은 ‘그래, 아프다. 힘들다’란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중환자실에서 본격적인 연명치료를 한 지 열흘 만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치료 도중 가족들이 의사에게 관을 빼면 안 되냐고 물어보았지만 관을 빼면 바로 사망하실 수 있다고 하니 망설여졌다. 지나고 나서야 든 생각이지만 며칠 빨리 가시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에게 말 한마디만이라도 편히 하고, 잠시만이라도 몇 숨 쉬었다 가셨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공간은 집이었다. 임종자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집이라는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장례식도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며 의료시설이 늘어났고, 죽음과 만나는 곳은 자연스레 병원이 되어버렸다. 가족에게 유언을 남기거나 지난날을 추억하는 마지막 대화를 나눌 기회는 줄어들고, 이제 죽음은 중환자실에서 억지로 호흡만 연장하다 떠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인간다운 죽음은 차갑고 기계적인 죽음으로 변모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전부터 그런 흐름이 다시 변하고 있다. 환자와 가족들이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할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고,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안락사 혹은 존엄사로 불리는 것이 바로 그렇다. 단어만의 뜻을 보면 안락사(安樂死)는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한다(安樂)’는 뜻이고 존엄사(尊嚴死)는 죽음을 ‘품위 있게 맞이한다(尊嚴)’는 뜻이다.
안락사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환자와 가족의 동의를 전제로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게 막연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사하도록 하는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가 그중 하나인데, 한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 허용되는 정상적인 형태의 안락사다.
이와 대비되는 ‘적극적 안락사(Active Euthanasia)’는 연명치료의 중단이 아니라 약물이나 기타 처치로 죽음을 앞당기는 방법이다. 적극적 안락사는 다시 한 번 회복 불가능한 환자와의 사전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자발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와 ‘의사조력 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로 나뉜다.
자발적 안락사는 의사가 의료적 처지로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의사조력 자살은 의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 자신이 어떤 장치나 약물 투여를 실행해 사망한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두 가지 모두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이므로 물론 자연사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일반적인 안락사, 다시 말해 연명치료를 중단해 자연스럽게 사망하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비교하면 윤리적으로 쉽게 허용되지 않는 방법이지만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등 일부 국가에서는 허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동의 없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자발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가 있는데, 이는 사실상 살인 행위로 모든 국가에서 불법이다.
한편, 존엄사란 회복 불가능한 환자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죽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소극적 안락사가 존엄사에 해당한다. 다만 법적으로 임종상태에 빠져 정신이 혼미해지기 전에 환자가 제출한 동의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2016년 1월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어 2018년 2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의 핵심은 본인의 의사결정에 따른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이다.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해두면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진단받은 환자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사용 등의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온전한 정신이 떠나버린 육체에만 막연히 행해지는 의술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생명윤리정책원에 따르면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2018년 2월 이후 2020년 7월까지 약 11만 명이 연명의료중단을 선택했다.
연명의료법이 시행됨으로써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죽음에 제동이 걸린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의료행위나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온전히 개인의 힘으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와 관련해 2018년 8월 열린 어떤 암 환자의 특별한 장례식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장례식 부고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는 전립선암으로 병원에 1년이 넘게 있습니다. 그리고 암은 온몸으로 전이 되었습니다. 소변줄을 차고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정신은 아직 멀쩡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당신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 장례식에 오십시오. 제가 죽고 나서 장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들의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감사를 전하고 싶고 화해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검은 옷 말고 예쁜 옷 입고 오세요.’
-〈BeMinor, 2018.8.14. ‘장례식, 꼭 죽어서 해야 하나요? 살아 있을 때 하고 싶습니다’〉
장례식은 환자의 바람대로 ‘생전 장례식’ 형태로 서울의 한 병원에서 열렸다. 환자는 이날 하고 싶던 모든 것을 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과 악수하고 포옹했으며, 다투고 멀어졌던 사람과 화해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장례식이 끝나고 병실로 다시 돌아갈 때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작별했다.
사실 장례식은 고인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행사다. 유가족이 고인의 빈자리를 지키며 3일 동안 죽은 이를 찾아온 손님을 응대해야 한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없는 무대다. 그러나 생전 장례식은 곧 고인, 즉 옛사람이 될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주인공이다. 앞에서 본 암 환자의 장례식은 장례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묵인해온 관습이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에 관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오랜 세월 유지되고 지켜지고 있는 예식이나 관습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위의 경우처럼 굳이 생전 장례식을 열지 않더라도 세상을 떠나기 전 지인들과 만나 미리 작별 인사를 고하는 방법은 가능하다.
SNS에 올라온 한 사진도 죽음이 오직 슬픈 삶의 종료가 아니라 훈훈한 마무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미국 위스콘신주에 살던 어떤 할아버지는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과 함께 맥주 한 모금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라는 바람을 이루고 싶었다. 그 결과 병상에 누워 코에 산소 튜브를 꼽고 맥주병을 들고 있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곁에서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이 활짝 웃으며 함께 맥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만들어졌다. 할아버지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눈 감은 지 몇 시간 만에 이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고 31만 개의 추천을 받았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두려움에 떨며 병상에 누워 있다가 맑은 정신이 떠나버린 육체에 무의미한 치료를 받으며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한 생각 바꿔 인간다운 품위를 지킨 채 스스로 떠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