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
강의실 밖으로 비가 내린다
검은 창문과
창백한 형광등 사이
나는 병실의 얼굴로 앉아 있다
스프링노트를 펼치면
검고 질긴 철책선
왼쪽 바닥엔 전공수업을 받아적고
오른 바닥엔 시를 쓴다
이웃나라엔 가뭄이 들었다는데 그럼
이곳과 그곳의 중점에선 비가 절반만 내릴까,
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드뷔시를 켠다
한쪽은 포근하고
다른 한쪽은 먹먹했다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허연 <얼음의 온도> 중
카피라이터로 첫 직장에서
첫 업무를 맡던 때의 일입니다.
아우디라는 자동차 브랜드와
컬럼비아라는 아웃도어 브랜드의
메인카피를 제작하는 업무였죠.
작지 않은 브랜드였기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생애 첫 카피라는 설렘으로
의자에 꼭 붙어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쓰고 또 썼습니다.
일의 온도를 잊고
시간의 중력을 잊고
그렇게 쓰고 쓰기를 거듭하다
펜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리려던 순간,
다 지나간
퇴근 시간을 발견했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카피라이터로서 저의 첫
몰입의 순간이었죠.
그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나는 꽤 오랫동안, 어쩌면 일생을 이 업으로 살아가겠구나...'
대학교 시절의 무수한 방황이
방향으로 수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야자 시간마다, 전공 수업마다
귀퉁이에 몰래 써내려가던 문장들이
시가 되고
카피가 되어
밥까지 먹여준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일생 내내 딴짓을 하고도
인생, 잘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건
길을 만드는 일 같습니다
내가 갈망하는, 또는 원치 않는,
두 개의 삶 사이에서
반쪽자리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시간을 잊고 빠져들
무언가가 있는 사람은
일생을 낭비해도
아깝지 않은 일이 있는 사람은
기어코 길을 만들어내고야 마니까요
좋아하는 것보다
좋은 스펙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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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절반은 지쳐있고,
나의 절반은 힘이 남았고,
나의 절반은 두려움에 떨고,
나의 절반은 용기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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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이현호 시인의 문장입니다
*위 시는 자작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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