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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석 Dec 28. 2017

쥬니어라고 생각하세요?

#직딩에세이 #27

회사에서 쥬니어는 보통 '배려'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아직 회사 생활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온전히 맡아서 진행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어떤 업무를 주어야 할 지 그리고 어떻게 멘토링을 하면 좋을 지 신경을 써 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배려는 사실 그 사람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쥬니어로서 받는 배려 안에는 '너는 아직 신입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쥬니어라고 포지셔닝되면, 그 사람에게는 실패해도 회사에서 타격이 거의 없는 일이 주어지고 사실상 권한과 책임이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일이 재미가 없어진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그만인 일이 도대체 어디가 재미가 있겠는가? 결국 일이 재미가 없으니 자꾸 딴 데를 기웃거리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 수없이 많은 조언을 듣고, 위로를 받고, 본인 스스로 쥬니어의 덫에 갇혀 버린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자신이 맡은 일은 회사에서 본인이 가장 잘하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낫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가 체계가 없고, 교육(혹은 OJT)이 부실하고, 매뉴얼이 없다고 툴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제대로 된 회사라는 것을 전제로) 매뉴얼이 없는 것은 보통 이유가 있다. 매뉴얼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보다 변화가 더 빠른 업종에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방향을 분명히 공유하되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어떤 업무를 할 지,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런 회사일 수록 도화지를 꺼내서 알아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감자 하나를 튀기더라도 매 순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튀길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반대로 프로세스가 이미 정립된 회사일수록 신입이 경력보다 그 업무를 잘 할 수 있을 가능성은 극도로 낮아진다. 이런 경우엔, 군말말고 빠르게 선임이 어떻게 업무를 처리하는지 어깨 넘어로 배우는 것이 최선이다.


신입이란,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사람이지, 
실패해도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한 소리는 듣겠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더 큰 질책을 받거나, 업무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또 어떤가? 스스로 한계를 지어버리면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페이스북에 다닐 때 '엑스턴십'이라는 이름으로 방학 중에 대학생을 오피스로 불러서 필요한 내용을 교육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생들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멘토링한 적이 있었다. 대략 20명 정도의 규모였고 이 중 4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페이스북 광고가 작동하는 원리를 교육하고, 광고주를 선정/분석하고, 캠페인 메시지를 잡고, 직접 광고소재(크리에이티브)를 제작하고, 광고주의 허락을 받은 후, 페이스북에서 제공하는 무상쿠폰을 통해 실제로 캠페인을 집행해 보고 그 결과를 광고주에게 피칭하는 업무였다. 약 8주 정도의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멘토링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이건 우리가 제일 잘해요!'라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고를 직접 만들어본적이 없는데, 광고주보다 더 잘 알 리가 없는데, 그냥 2달 동안 배우러 온 건데, 포토샵도 다룰 줄 모르는데... 이런 '걱정'들을 하면 스스로가 위축되고, 무엇인가 '지시'를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주도성이 떨어지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도 낮아진다.


광고주는 당시에 관계가 좋았던 빅커머스 중 하나를 선정했다. 보통 대학생들의 프로젝트는 실제로 성과가 낮은 경우가 많고 아무리 테스트라 하더라도 페이스북의 실 사용자에게 자신의 서비스에 대한 광고가 나가게 되면 생각지 못했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다행히 이런 리스크를 혼쾌히 받아들이고, 대신 '요즘 여대생들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까'에 관심을 가져준 광고주로 방향을 정한 뒤 8주 프로젝트를 바로 시작하게 되었다.


여대생이 광고주(빅커머스)보다 강점을 보일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자주 오해를 하는 부분은 '자신감을 갖는 것'만으로 실제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점이다. 이것은 병원에 가서 '가짜약'을 받아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약을 먹었다는 생각에('자신감을 가지자!'라는 생각에) 감기가 나을 수는 있겠지만, 이것 보다는 '자신이 실제로 잘 할 수 있는 관점'을 찾아 새롭게 접근하는 것이 백배 낫다.


여대생들이 쇼핑몰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알아요.


이 말 하나로 끝이다. 소비자와 '같은 나이'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큰 장점이다. 특히 광고주의 실무 담당자가 타겟 소비자층과 성별이 다르거나 나이차가 많이 날 수록 이러한 부분들은 더 빛을 발하게 된다. 남자라면 '여대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요? 학교 가서 한 번 물어볼까요?'라고 하면 그만이고, 나이차가 좀 있는 여성이라면 '아, 예전엔 그랬군요. 요즘은 좀 바뀌긴 했어요'라고 하면 상대방이 '광고주님'이고 이 쪽이 '대학생일뿐'이라고 해도 전세는 역전되기 마련이다.


물론 쇼핑몰에 대한 기본 개념은 익혀야 한다. 중국에 공장을 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논의를 했던 대학생일수록 정작 '일반 소비자로서의 자기자신'과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굉장한 전문지식보다는 (업계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근 사람이라면) 최소한 아는 정도의 지식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 파고들면 다시 상대방이 더 강한 영역에서 싸우는 것이 되고 자신을 잃게 된다. 반대로, 최소한의 지식도 갖추지 못한 채 공상 속에서 쇼핑몰을 바라보면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균형은 멘토가 잡아주면 된다.


프로젝트의 굉장히 많은 시간을 자신감 회복, 관점의 전환, 그리고 페이스북의 동작 원리를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다. 소재는 언제 만들고 캠페인 운영은 언제 해 보나 하고 걱정하는 학생도 있었을 지 모르지만, 초기에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엑스턴쉽이라는 것을 잊고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프로젝트를 끌어갈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은 '예나'라는 이름의 엑스턴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눈에 잘 띄지 않았고 특별히 의견이 강하거나 (소재 제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림을 잘 그리는 편도 아니었다. 처음에 몇 번 냈던 중간 과제물들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불분명했다. 그나마 좋은 점이 있었다면 '디자이너도 아닌데 색상은 잘 쓰는데?' 정도였다. 사실 '색상'을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내용'이 부실했단느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예나'의 장점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1. 세션에 집중한다.

2. 전달되는 말의 '표현'이 아닌 '내용'에 포커싱한다.

3. 자신이 들은 이야기의 반은 버린다. (적극적으로 듣되, 말한 의도를 캐치한 뒤에 필요없는 내용은 버린다)

4. 질문의 퀄리티가 높아진다. (안타깝게도 질문이 없거나,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분들이 많다)

5.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6.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보다는, 성과에 대한 피드백에 집중한다. 

7. 시간의 지날 수록 과제의 완성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캠페인 목적과 컨셉이 정해지고, 크리에이티브를 제작하고, 직접 운영도 해보고, 그 결과를 광고주에게 피칭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들어와주셨던 부사장님이 매우 만족해 하셨다. 프로젝트 일정 상 2월초를 타겟으로 삼고 진행했던 캠페인이었는데,


페이스북에는 어떤 내용으로 광고를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광고를 보는 시점이 언제인지도 매우 중요해요. '관심'이 있는 내용일 수록(자신과 연관성이 있을 수록) 페이스북이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더 잘 찾아주기 때문이에요. 2월초에 여대생들은 무엇에 관심을 갖을까요?


피칭을 하면서 이렇게 물었는데 '글쎄요, 설날인가?'라는 광고주의 답에 웃으며 답했다(참고로 설날과 추석은 모든 빅커머스에게 가장 중요한 시즌이다. 다만 여기서는 캠페인 타겟이 18-24 여대생이었을 뿐이다).


(거봐요, 여대생 마음은 여대생들이 더 잘 안다니까요) 당연히 발렌타인데이죠! 초콜렛을 주고 싶은데 기성제품은 사기 싫고, 그렇다고 누구나 다 근사한 수제 초콜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사귄 기간이나 손재주에 따라서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다양한 콜렉션을 보여주면 관심을 끌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대생들이 쓰는 바로 그 표현으로요!


이렇게 피칭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슬로건,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주었고, 그것들을 사용한 실제 캠페인 결과가 기존의 (다소 딱딱한) 광고보다 30% 이상 더 효과가 좋았다는 점을 '숫자'로 보여주었으니 싫어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광고주의 관심을 끈 후에 '그렇다면 3월부터 8월까지는 여대생들이 관심 갖는 어떤 이벤트들이 있을까요?'라고 마케팅 캘린더를 보여줌으로써 그 날 피칭을 마무리지었다. 예나와 같은 팀 한 명은 이후, 광고주부터 '3월부터 6월까지의 여대생 플랜을 짜오라는' 인턴 제안을 받아서 페이스북 엑스턴십 종료와 함께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고, 예나의 경우 이러한 경험을 살려 다른 스타트업 두 곳의 인턴을 거쳐 졸업 후 자신이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뷰티'와 '커머스'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멘토는 어디까지 하고, 멘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캠페인 슬로건, 크리에이티브 제작, 캠페인 운영은 모두 2인 1조로 진행되었던 예나와 다른 한 명의 여대생이 진행을 하였다. 강단녀인 예나의 경우, 예시로 준 멘토의 모든 제안들을 '그 제안을 한 이유'만 캐칭한 후 모두 버리고 자신들의 언어와 관심사로 바꾸어 진행을 했다. 반대로 페이스북 캠페인 운영 방침처럼 자신들이 약한 부분은 수많은 질문으로 필요한 부분을 철저히 익힌 후, 멘토의 모니터링이 거의 필요없을 정도로 최대한 직관적인 방식으로 운영을 하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예나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포토샵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럼 소재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바로 '그림판'이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를 기대하면 안 된다. 실제로 예나가 만들었던 소재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소재마다 폰트의 크기와 위치가 조금씩 달랐다. 광고주나 대행사 눈에는 무엇보다 이러한 차이가 잘 보였을 것이다. 다만, 실제 페이스북에서 18-24의 여성들은 크리에이티브의 형식적 차이보다는 컨텐츠 내용에, 그리고 여대생들이 쓰는 바로 그 말투와 표현에 더 큰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인턴, 신입의 경우 자신감을 갖되, 실제로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기존의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되, '자신의 판단'으로 걸러내야 한다. 질문을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충분히 생각해 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질문을 받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언제 질문을 하고, 언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지는 센스의 영역이다(이건 교육으로 잘 바뀌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단 일하는 방식이나 목적을 이해한 뒤에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관리가 필요없는 사람'과 일하는 것은 모든 매니저(혹은 멘토)의 꿈이다.


모든 변화는 스스로 '쥬니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배려는 필요하지 않다. 실패하면 그만큼 배우고 다시 훌훌털고 일어나면 된다.


당신은 그냥 같이 일하는 '동료'이다. 좀 덤벙거리기는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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