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석 Dec 29. 2017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직딩에세이 #28

Bullying. '약자를 괴롭히는 것' 혹은 '집단 따돌림'을 의미하는 단어다. 두 의미를 결합하면 '여러 사람들이 한 명을 집중적이고 반복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약자'란 의미는 의도적으로 뺐다. Bullying을 당하는 사람이 약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 한 명을 지속적으로 배척하는 경우 그 사람은 어떤 의미로든 깊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문제가 될까.


전자가 더 문제가 되는 경우는 한 가지 뿐이다. 그 한 명이 '정말로 많은 권한'을 가진 경우다. 가령, 어떤 회사의 대표 혹은 어느 부서의 조직장이 인사권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경우를 Bullying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들'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한 명으로부터 괴롭힘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은 모여서 뭔가 대책을 궁리할 수도 있고, 서로 하소연할 수도 있고, 몇 명은 회사를 나가거나 부서를 이동함으로써 독재에 항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으로부터 난타를 당하는 경우, 그 한 명은 매우 외롭다. 


반복되면 정신 상담을 받아야 할 상태가 되는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경우 카운셀링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미드에서 일상적으로 보는 장면'들과 비교했을 때 부족한 부분이 많다.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서점에서 책을 읽기도 하겠지만, Bullying은 신발 안으로 들어온 돌멩이와 같아서 앉아 있을 때('괜찮아'를 스스로 세 번 되내어 보고 있을 때)는 나아진 것 같지만 일단 걷기 시작하면('직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맞닥뜨리면') 금새 아픔을 느끼게 되고, 굳은 살이 박히는 대신 상처가 나고 살이 썩기 시작한다.


네 잘못이야, 네가 자초한 일이야.

많은 사람들이 네게 그런 행동을 하는데는 이유가 있어.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해.

넌 '바뀔 수' 있겠어? 싫으면 말고.


Bullying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한 명 두 명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라고 생각을 해도, 그것이 다섯 명이 되고 열 명이 되고,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이러한 피드백을 받게 되면,


정말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물론 개인의 성장에 매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의 어떤 중요한 문제들은 '다수결'로 정의내릴 수 없다. 가령 그 시절 미국 남부의 농장주 99명이 모여서 노예해방이 필요하다는 1명에게 피드백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같은 아파트 주민 99명이 모여서 어떤 시설이 단지 근처에 생기는 것을 허용하자는 1명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그리고 그 아파트 주민들을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그 아파트 주민들의 이기주의(?)를 비난하는 것도 그렇다. 표본이 제대로 추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실제로 잘못된 피드백을 여러 사람에게서 반복해서 받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가 보다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에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안다. 안다. 안다. 그런데 분명히 아는 이야기고, 스스로에게 '이건 백명이 와서 같은 이야기를 해도 난 스스로에게 떳떳한걸'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슈라도,


Bullying은 그 사람에게 심각한 내상을 입힌다.


직장을 다니면서 자주 발생했던 난감한 상황은 '여러 사람들이 한 명을 앞에 놓고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난타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람이 오면 말을 멈추고,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 불편한 표정을 짓고, 무수히 많은 그들만의 1:1이 시작된다.


'우리는 당신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두고볼 수 없어요'란 말을 HR팀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는데, 이 말을 하면서 '왜 Bullying이란 표현을 쓰는가' 하는 점이 굉장히 궁금했다. 아이러니했던 상황은 이 경고를 받았던 상황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배려(?)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배려에 물음표를 찍은 것은, 배려를 받는 사람은 비정규적이었고 사람들이 배려한 부분은 '비정규직이니까 네게는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을께'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이가 없고, 우리는 모두 같은 동료라고 말했던 그 사람들이 말이다. 오히려 이것이 더 Bullying에 가깝지 않은가.


뉴스에 집단 따돌림 이슈가 나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저런 행동을 하는가?'에 대해서 분개하고, 회사로 돌아와 Bullying에 동참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1) Bullying을 하는 사람들은 악마같은 사람들일 것으로 생각한다.

2) 본인은 악마같은 사람이 아니다.

3) 따라서, 자신이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고 있는 것이 Bullying일 수 없다.


대략 이런 패턴이다. Bullying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해 '저 사람은 도대체 왜 그래? 왜 우리같지 않지?'라는 인식이 결합하면 더욱 평온감을 갖는다. 여기까지는 또 봐 주겠는데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을 '다양성(Diversity)'를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포장하는 것은 보기가 많이 버겁다.


직장에서 Bullying에 처한 동료를 보면 의식적으로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Small Talk을 싫어하는 내가 날씨 이야기도 하고, 밥 먹었는지 물어보는 것은 대부분 이런 경우였다. 인생상담이야 원래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업무'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을 많이 챙겨주곤 했다. Bullying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적은 없다. 소수의 편에 서 있던 것은 누구보다 익숙한 경험이었으니까. 


다만, 그렇게 우리는 행복한 직장에서 다니고 있고 동료애가 철철 넘친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Bullying에 참여하는 모습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고.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굉장히 안 좋은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자신이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잔인해질 수 있다. 슬프게도 너무나 많은 직장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행복한 직장이건 불행한 직장이건 상황은 그렇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은 Bullying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돌멩이를 같이 던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쥬니어라고 생각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