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늘은 검은빛이다. 낮 동안엔 시험공부나 과제에 짓눌려 땅을 보며 걷는다. 그러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좁은 길을 걸으면, 띄엄띄엄 있는 희미한 전등들과 하늘의 달만이 내 세상을 비춘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하늘을 본다. 무엇이 보이는가? 달, 별..인공위성인가? 잘 모르겠다.
결국 어제도 오늘도 나는 검은빛 하늘을 보며 집으로 돌아간다.
초등학교 때도 나는 저 밤의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다른 점은 그땐 하늘에 별이 많았다.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여러 별자리에 대해 공부한 적 있는데, 별자리를 배운 날에, 학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날 배운 별자리를 하늘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쌍둥이자리, 전갈자리, 사자자리.. 그때 내가 좋아했던 별자리는 물병자리였다. 심각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내 생일이 1월이어서 1월 별자리인 물병자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밤하늘의 물병자리를 보며 소원을 빌었다. 친구와 싸운 날엔 화해하게 해달라고, 다음날 시험이 있으면 잘 보게 해달라고, 사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엄마가 사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이다. 매일 매일 소원은 달랐지만 나는 그 물병에 내 여러 소원을 따랐다. 하늘에 나의 소원들을 담아두어서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나에겐 밤하늘이 검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빛나 보였다. 그리고 별을 올려다보는 나의 눈 또한 마찬가지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땐 그렇게 순수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 영원히 빛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어느 샌가 그 별빛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빠진 나의 일상을 대변하는 것인가. 학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해야 할 과제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남에 따라 밤하늘의 별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별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꿈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늘어가는 학업 부담감에 당장 그날 해야 할 숙제를 해나가느라 바빴고 미래의 꿈이나 목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렇다. 내가 어릴 적 꿈을 담았던 물병은 깨진지 오래였다. 과연 이제 나는 내가 앞으로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속에서 나의 목표를 의심한다. 아직도 가끔 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밤하늘을 본다. 하지만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지친하루를 위로해주거나, 소원을 빌별은 이제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공위성에 대고 소원을 빈다. “커서 돈이나 많이 벌게 해주세요“.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쓸쓸해진다. 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이거였나라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위성 불빛에 반사된 나의 눈빛은 흐리멍텅하고 의지가 없다. 어쩔 땐, 내 삶이 불행한 것만 같다. 별이 사라진 건 운명이었나 보다. 별이 나의 행복한 기억들도 같이 데리고 사라졌나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슬픈 일만 가득한가보다. 더 이상 밤하늘의 북극성이나 물병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대의 하늘은 아직 반짝이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같은 하늘을 공유하고 있다. 이 시대라는 하늘에, 모두 같이 별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자신이 불행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래서 이 시대가 다 같이 슬픈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 도대체 우리 하늘의 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저 멀리 보이는 공장에선 조용히 연기가 피어오른다. 산업화가 이룩한 무궁한 발전에 뒤따르는 폐해랄까.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을 계속 갈망하면서 공장이 세워지고 발전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기술 발전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우리는 별을 따다가 신제품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밤하늘의 별을 때어 스마트폰을 만들었고, 고층빌딩을 지었다. 또 새로운 관광지를 지었고, 이 시대엔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번지르르한 간판도 걸어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좀 나아졌는가? 전혀. 사람들의 어릴 적을 담은 별들을 때어 만든 신기술의 가치는 그 사람들의 꿈과 소망을 전혀 이루어주지 못했다. 어릴 적 우리의 소망은 어땠는가? 우리는 어릴 적에도 땅따먹기나 보드게임을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저 높은 밤 하늘아래 서로를 도왔다. 그때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그 시간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빛나는 별빛이 우리의 심판이 되어 주었기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승패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 행복할 수 있었다. 나와 내 친구가 행복한 세상, 그것이 아이들의 소망이었고 우리들의 소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순수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그들은 하늘의 별 빛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앞 세대 사람들이 띄워놓은 인공위성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북두칠성을 보지 못한다. 나침반이 없어진 그들은 어린이와 어른사이의 넓은 해협에서 방황하고 표류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다양한 꿈이 아닌 9급 공무원과 대기업 입사를 원한다. 줄어든 밤하늘의 별처럼 꿈의 다양성도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학업 부담감은 갈수록 커지고 학교에선 점수를 얻기 위해 서로 시기한다. 나와 친구들의 성공이 아닌 자신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 순수했던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 그들은 여전히 일자리를 찾기 위해,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회사에 고용되더라도 어릴 적 꿈과는 별개의 일이다. 모든 사람이 어렸을 적에는 각자의 목표, 비전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세상 사람들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황된 가치를 따른다. 돈이나 권력.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당장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아 좀 더 넓은 땅, 재력을 갖는 것,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우리가 어릴 적 했던 땅따먹기나 보드게임과는 전혀 딴판이다. 나와 내 친구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소망은 이젠 너무 벅차다. 우리는 이제 혼자만의 승진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간다. 줄 세운 공장들의 자욱한 연기에, 우리의 흐리멍텅한 눈동자에, 뿌옇게 물든 마음에, 별은 우리를 보지 못하고 우리도 별을 보지 못한다. 이제 별은 우리에게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는다. 그저 밤하늘의 인공위성만이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말을 건넬 뿐이다.
“돈이나 많이 벌어 야지”
밤하늘엔 더 이상 별이 떠있지 않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보았는가? 나는 얼마 전 우리 동네의 산을 올랐다. 산에 올라가는 와중에는 올라오기 시작한 것에 후회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상에 올라섰을 때,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별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때 나는 별들의 입장에서, 고개를 내리고 내가 살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넓게만 느껴지던 우리 집 거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며, 나의 아파트 단지는 이쑤시개 같이 작아보였다. 놀랍게도, 내가 어린 시절부터 평생 살아왔던 동네는 한 눈에 모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그 마을 속에, 아파트 단지 속에, 그 중 한 집의 거실에서 내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높은 곳에 오른 나에겐 나와 내 친구들은 그리 큰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보다 더 높이 떠있는 별에게는 우리가 먼지보다도 작게 보일 것이다.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는가. 그 작은 것들이 서로를 시기하는 모습이, 서로를 밟고 올라가려는 우리들의 그 마음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는가. 그리고 옛날에 집 앞 놀이터에서 봤던 일이 생각났다. 학교 앞 놀이터를 지나가는데 개미들이 잔뜩 들어있는 채집함을 보았다. 꼬맹이들이 그 개미들은 한데 모아놓고 시합을 벌이기로 하였나보다. 그들은 놀이터에서 개미들을 하나둘 모으더니 채집함에 그 개미들을 집어넣었다. 개미들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좁은 곤충채집함 속의 개미들은 서로서로 채집함 밖으로 나오려 하였다. 벽을 타고 한 개미가 기어오르면 다른 개미는 앞에 있는 개미를 밟고 올라갔다. 하지만 처참한 레이스 끝엔 어떤 개미들도 채집함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때 지켜보던 나와 그 아이들은 채집함 속 그들의 생존본능을 비웃었다. 그 작은 세상에서 서로 앞 다투어 나오려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개미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좀 이따 풀어 줄 텐데 쓸데없이 고생 하네’ 별이 우리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별의 입장에서 우리는 지구라는 채집함 속에 사는 개미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가 서로 성공하여, 허황된 가치를 쫓아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모습들은 채집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개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렇다면 별들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쓸데없이 고생 하네’ 이를테면 나의 일말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거나, 시험이나 승진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들이나 별들이 보기에 정말 콩 알 만한 이 지구에서 그 보다 더 작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들, 모두 다 별에게는 작아보였다. 우리에겐 그렇게 큰일이었는데, 별들에겐 쓸데없는 고생에 불과한 것이었다. 생각해보자. 한 개미가 다른 개미들을 밟고 채집함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그 개미를 칭찬했을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겨서 성공을 누리게 된다고 하면 저 하늘의 별들 아래 우리는 떳떳할 수 있을까? 우리가 소망하는 재력과 권력이 그들에겐 얼마나 작아보였으며, 그것을 얻는 과정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느냔 말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쌔 보이고 멋져 보여도 별 아래에선 조그마한 개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앞선 이들과 같은 길을 걸을 때, 별들은 우리에게 충고를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왕이면 서로 도우면서 살면 어떻겠냐고, 어차피 이 작은 세상에 잠깐 살다가는 거 옆 사람들과 좋은 추억 만들고 가라고. 괴롭히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무엇보다 희망을 가지라고.
별은 아직 하늘에 떠있다고.
빛나는 밤하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나 내가 하고 싶은 것들, 해야 할 것들, 하지 말아야 할 것들, 그것들을 하늘의 별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학교 시절 나의 슬픔을 위로해 주었고, 나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나의 꿈을 기록해 주었으며, 앞으로 잘 될 거라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저 하늘아래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의 하늘이 나만의 하늘이었을까? 아마 모든 어린이들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수많은 별들이 아이들의 순수한 꿈을 담아둘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당시 모든 아이들의 눈이 순수하게 반짝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 별들은 하나하나가 우리의 꿈이었으며, 소원이었으며, 슬픔을 위로해주던 눈물들이었다. 또 우리가 그린 별자리 하나하나가 행복한 기억이었고, 북두칠성은 우리가 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나침반이었다.
우리의 별들은 어디 가지 않았다. 먹구름이 잠시 우리 시야를 가렸을 뿐이다. 그 너머엔 우리가 꾸었던 꿈들이나 어릴 적 행복들이 아직 반짝이고 있다. 나의 꿈을 담아 두었던 물병자리도, 우리들의 나침반 역할을 했던 북두칠성도, 아직 우리 위에 떠있다. 허황된 가치에 목메어서, 서로를 밀어내는 이 레이스는 잠시 멈추자.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아마 그때 보이는 별은 인공위성이 아닐 것이다. 거기엔 물병자리가 있고, 북두칠성이 있고, 그대의 꿈이 담긴 은하수가 있을 것이다. 저 하늘 위의 은하수에 그대의 조그만 이기심이나 허세는 씻어내라. 그리고 뒤에 오던 사람들의 손을 잡고 다 같이 결승선을 통과하자. 모두가 1등이 된다면, 그렇다면 나와 내 친구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우리의 어릴 적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음날도 어김없이 모든 일과를 마친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좁은 길을 걷는다. 그 길에선 역시 띄엄띄엄 있는 희미한 전등과 하늘의 달만이 내 세상을 비춘다. 그리고 그때 나와, 내 옆의 그대는 다시 하늘을 본다. 무엇이 보이는가? 저 하늘은 더 이상 검은빛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