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로부터의 격리는 고통이다. 이는 물리적 격리뿐만 아니라 정신적 격리를 의미하고 객관적인 격리뿐만 아니라 개인이 판단했을 때 격리되었다고 느끼는 상황을 모두 포함한다. ( 흔히 세상이 나를 버렸다 하는 )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고통이 되는 이유는 고독감, 외로움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은 모든 것을 그립게 하고 온갖 불안한 생각, 좋은 생각에 나를 가두는데 그 상상이 지속되면 내 정신이 구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더 큰 고독과 불안, 허구의 희망을 느낀다.
물론 혼자만의 시간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자기를 계발하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삶을 꾸려나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유가 억압되어있는 상태에서의 자기만의 시간은 온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때의 개인은 그 순간에서 탈피했을 때에 해야 할 것들, 벌어질 상황들에 초점을 맞춰 삶을 설계하는데 그것들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생활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온전히 자기만의 인생을 설계하기보다 현재 결핍되어 있는 다를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온전한 자아성찰은 사회에서 자기만의 시간이 결핍되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가 결핍되었을 때의 자아 성찰은 사회의 환상 속에 날 다시 가두고 사회에 진입했을 때 절망감을 안겨주게 된다.
사회에 진입했을 때의 절망감은 여러 형태로서 드러난다. 결핍의 상태에서 꿈꿨던 사회생활은 현실과 다른데 일례로 밖에서 언젠가 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에 소홀하게 한다. 정말 애타게 보고 싶던 사람들은 그럴 수 없을 때의 환상으로서 존재한다. 보통 사회의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을 주고 그렇지 않더라도 꿈꾼 만큼 날 기쁘게 하지 않는다. 이는 계획도 마찬가지고 다른 여타의 삶의 요소들도 그렇다.
하지만 더 큰 절망은 다시 결핍의 상태로 진입했을 때 느끼게 된다. 세상의 진리이자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이들, 모든 순간이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었단 것. 꿈꿨던 만큼은 아니지만 자유의 상태에서 만났던 사람들, 했던 모든 작업들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는 허황된 꿈을 쫓아 욕심을 부리던 개인에게 잔잔한 일침을 가한다. 벌써 또 한 번의 기회를 잃었다고 말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애석하게도 필연적이다. 한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는 그때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미리 일체화되어있는데 그것은 그 상황 고유의 것이어서 개인이 그곳에 진입했을 때 그 감정의 장의 영향을 받아 감정을 느낀다. 즉 개인은 그 상황에 닥치지 않고서야 그곳에 일체화된 감정들을 느낄 수 없다. 또 그 상황에선 그곳에 결부된 감정밖에 느끼지 못한다. 이는 차원의 문제다. 마치 3차원 시공간에 사는 우리가 11차원의 공간을 지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3차원 시공간과 4차원 시간축 어느 한 지점에 결부되어 있는 이 감정 요소에 관련된 차원은 우리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어있는 무의식의 영역이고 차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정론적으로 이러한 절망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며 치유의 대상으로 보았다. 물론 완전한 치유는 불가능하다. 앞서 설명했던 필연성 때문이다. 그래도 절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에 자기 자신을 의탁하여 이를 극복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진 않는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결핍과 자유를 오가면서 느끼는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차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상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11차원의 공간을 지각할 순 없지만 수식으로 상상할 순 있다. 그리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걸어올 수 있었던, 걸어왔던, 걸어갈 수 있는 모든 길, 상황을 상상해볼 순 있다. 이때 상황을 바꾸면 그에 수반되는 감정도 같이 바뀐다. 삶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러한 가능성과 그 상황에서의 감정을 떠올리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정렬되어있는 인생길에서 내가 갈 수 있는 올바른 루트의 길을 선택하면 된다. 물론 개인의 선택이 항상 옳지는 않지만 이러한 고민들이 한 개인을 절망의 치유와 행복의 점근선 위를 달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회에서 격리되었을 때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상황에 자신이 꿈꾸는 감정이 수반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한다. 또 격리된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당연함을 인식하고 그 감정을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가야 한다. 이를 테면 분노는 추진력을 주고 외로움과 고독은 비판 능력이나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데 도움이 된다. 감정을 바라지 말고 감정을 이용해라. 그리고 자유를 되찾았을 때는 이렇게 행동하자. 가만히 앉아서 어떤 감정, 돈, 관계가 닥칠 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어야 한다. 자유는 이런 선택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변인에게 다가가 친절를 베푸는 것은 뿌듯함과 희열을 준다. 일을 하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을 제공한다. 새로운 커뮤니티를 찾아가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준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사회적인 감정, 보상은 그 상황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다 해도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다. 여전히 다른 관계에서 실망하고 예측하지 못한 일에 고통스러워할 것이며 나태함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이를 상기시키고 개선하기 위한 한 가지 행동만이라도 한다면 우리가 원래 도착 예정이었던 종착역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종착역으로 갈 수 있도록 선로를 틀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온전한 자아 성찰이며 결국 치유에 점근 할 수 있는 도구이다.
여전히 사회로부터의 격리는 고통이다. 인간관계는 항상 힘들다. 그래도 분명 돌파구는 있다. 언젠가 이 글을 쓰는 나조차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이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어볼 나를, 혹은 다른 개인들을 그 지점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고, 필연적으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