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란된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늦은 저녁, 차가 달린다. 높은 고가 다리에서 바라보면 어둔 도시의 멋진 풍경, 차는 그에 필적한 훌륭한 주체이다. 수평에서, 도로 옆 인도에서 바라보면 나보다 빠른 존재. 혹은 바람을 일으키는, 나는 무시할만함에도 작은 존재들을 진동시키는, 그 바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차는 달리기만 해도 이리도 많은 의미를 가진다. 아니다 저녁에 달렸기 때문에 차가 가지는 의미가 더 와닿는 것이다. 아침에 달리는 차는 그 실체가 너무 쉽게 포착된다. 산업화의 부산물 같은, 그런 모습은 차를 타락시킨다. 도시를 기계적으로 만드는, 출근을 재촉하는 촉매로, 사정없이 달려드는 냉혈한 금속으로 만든다.
반면 저녁에 달리는 차는 흩날리는 기인 리본을 달고 있다. 저녁의 어중간한 어둠이 차에 부딪힐 때, 속도가 가르는 어둠은 헤드라이트의 흩어지는 빛과 함께 차체를 타고 뒤로 길게 미끌어진다. 마치 리본처럼. 산란된 헤드라이트 불빛이, 여백을 채워주는 어둠이 나의 피부를 스친다.
검은색 배경은 빛이 춤추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 내려 쬐는 햇빛에 맥을 못 추리던, 도시의 빛들이 태양이 힘을 잃은 저녁, 그에 비해 매우 작은 동력체의 속도에 의해 자유를 얻는다.
요새 들어 자유가 필요하다. 할 일이 없어졌는데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사실 뭐가 자유인지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나는 오전의 자동차와 같다. 무언가 하려고, 어딘가로 향하지만 햇빛 같은 사회의 시선이 머리 위로 꽃히는 느낌이 든다. 하는 행동들이 모두 사회 관념과 연관되어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그리 따갑지 못한 시선으로 바뀐다.
출근길 아침에 찍은 서울 한복판 사진 속 자동차들은, 나라 경제를 움직이는, 뛰어난 일꾼 같아 보인다. 아침에 나처럼. 암묵적으로 주어진 사회의 과제들을 해나가야 하는 일꾼들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인도의 관찰자들에겐 그들보다 빨라 부지런해 보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간 나를 보며 자극을 받아 진동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라는 햇빛 아래 진정한 나는 없는 느낌이다.
나는 달리고 싶다. 자동차처럼. 하지만 저녁에 달리고 싶다. 배경색을 바꾸고 싶다는 것이다. 배경색을 바꾸는 방법은 망각이다. 선택적 망각. 배경에서 태양을 지워야한다. 관념을 초월한 생각이 필요하다. 주위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배경에 너무 얽매여서도 안된다. 쉽지는 않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말이다.
늦은 저녁 높은 고가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들을 해본다. 헤드라이트로 긴 자취를 그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내가 가진 빛들이 춤출 수 있게, 그렇게 달리고 싶다고, 산란되는 빛들로 이루어진 리본을 달고, 어둠 속에서 자유를 얻고 싶다고, 어느 한 순간은 이 사회의 구성원 보다는 산란된 빛의 흐름들로 표현된, 자신이고 싶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