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며
역사란 세계 정신이 자신의 뜻을 성취해나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는 공장의 기계 부품처럼 우리의 삶에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노력은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증거인데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각자 개인의 삶은 전체 과정 속에서 특이성을 지니게 된다. 이때 그 노력은 선택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특이성은 세계 정신의 절대적 조화를 이루는 부조화의 일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는 각자의 선택으로 고유한 삶을 살 수 있으며 하지만 이러한 개인 간의 차이는 전 인류적 차원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게 된다는 뜻이다. 열역학 법칙을 예로 들면 열역학 과정 중 열기관에서 열이 이동하며 각기 다른 일을 하지만 결국 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 흐른다는 것은 이 인생의 특성을 훌륭하게 비유한다. 개인의 삶은 보장되어 있지만 그 속의 기본 원리는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믿고 확신을 가지며 각자의 신념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자유 의지라 부르고 따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세계 정신의 뜻에 따라 죽어간다. 악보 위에 춤추며 타들어가는 음표들처럼.
자아는 독자적이며 단일하고 고유하다. 그리고 자아를 인식함으로서 우리는 주체로 살아있음을, 실존을 향유한다. 문제는 우리의 자아가 세계정신에 순순히 편승함으로서 발생한다. 세계정신의 양태로 나타나는 역사적인 사회규범, 제도, 관습들은 우리가 사회가 설정한 목표에 자아탐구 방향을 맞추도록 한다. 돈, 명예 등과 각종 종교의 교리들은 왜곡되고 변형되어 우리를 세계정신이 기용한 배우와 같게 만든다. 이는 우리가 항상 불행해지는 이유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그저 '나' 자신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사회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감정에만 충실한 삶은 자아가 헛된 목표에 종속된 채 살아가는 시간이며 최후의 순간에 허무함을 안겨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순간의 허무함은 현재에도 존재한다. 모든 가능세계는 인간에 내재되어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의 순간을 겪는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다. 모든 가능 세계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히 허무함을 느낀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세계 정신의 영향력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세계가 우리 자아 속의 그런 부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 우주를 이루는 수 많은 가능 세계에서 허무함이 아닌 희망과 행복의 삶을 발견해야 한다. 또 탐구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으므로 명상하고 호흡함으로서 독자적인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 나아가 타인, 다른 모든 사물에 그것이 내제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찾아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우주를 산다. 우리는 세계 정신이란 우주에 떠다니는 고유의 정서적 중력을 가진 은하일 뿐이다. 내가 다른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자아의 확장이다. 우리를 가두는 세계 정신을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았을 때 우리는 강물 위를 떠다닐 수 있고 바다 위에서 유유히 항해할 수 있다.
핀터레스트 정민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