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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인생 잘라내는 비용 15000원

by 몽상가

삭발을 했습니다.


미용실에 가서 스님처럼 삭발이 가능하냐고 물었어요. 미용사가 물어보더군요.


"어디 아프세요?"


저는 암에 걸리거나 뇌수술을 앞둔 환자가 아니에요. 제 버킷리스트 중에 삭발이 있었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잘랐어요.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바리깡으로 미는 데 10분, 비용은 15,000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잘라내는 비용이 15,000원이랍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가벼운 가격이지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를 완벽하게 자르고 깎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을 잘라낸 것이지요. 그래서 가벼워졌나고요?


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평소에 커트를 할 때는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묘한 쾌감이 있었거든요. 저의 경우에는 아주 짧게 머리카락을 잘라낼 때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즐기는 편이었습니다. 짧은 머리를 선호한 이유이기도 해요.

최근 몇 년은 어떤 이유로 인해 긴 머리를 고수했습니다. 주변에서 짧은 머리보다 긴 머리가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듣기 좋았고 다른 이의 눈에 예뻐 보인다니 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답답했어요. 싹둑싹둑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쇼트커트가 아닌 삭발을 하고 싶었어요. 이런저런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 보니 삭발로 인해 타인이 불편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맞아요, 오늘이 딱 그날입니다.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결정한 날이요.


커트만으로도 무거운 번뇌가 잘려나가는 시원함과 쾌감을 느꼈으니 머리를 완전히 미는 삭발은 커트에 비교가 되지 않는 가벼움을 동반한 쾌감이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실제는 기대와 달랐어요. 당황했습니다.

뭐랄까... 좀 놀라고... 좀 움찔거렸고... 좀 걱정이 되었어요.


1차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자릅니다. 흡사 쥐가 뜯어먹은 것 같이 막 잘라요.

2차는 바리깡으로 머리를 야무지게 밉니다.

10분이면 끝나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잘라내는 비용으로 15,000원을 지불하면 됩니다.


새 사람이 되어 바깥세상으로 나왔어요.

허... 참... 무거워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주의 무게가 머리에 달라붙었어요. 바람이 날아와 앉았다 가고 공기가 스쳐가요. 머리카락이 있을 때는 못 느꼈던 우주의 무게가 머리에 스쳐갑니다. 온 우주가 머리에 내려앉았어요. 가볍고 싶었는데 머리가 더 무거워졌습니다.


냉방이 잘 된 곳에서 오래 있다 보면 몸이 어는 느낌 아시죠? 마치 에어컨 바람 밑에 머리를 대고 있는 것 같이 전류가 흐르는 느낌 때문에 무게를 더 느낍니다. 그래서 또 무거워져요. 재미있는 것은 모자를 쓰는 순간, 우주의 무게가 사라진다는 사실이에요. 우주의 무게를 이고 사는 것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모자를 써야겠습니다.


삭발 후에 물리적 느낌은 생각과 다르게 무거웠습니다.

내적으로는 참을 수 없이 가볍습니다. 가벼움에 도취되어 웃음이 삐져나와요.

그 모습을 본 친구가 말하더군요.


"변태가 맞아, 너는 변태 중에서도 고상한 변태야."


고상한 변태? 하긴 친구들 사이에서 변태 소리를 듣는 편이라 익숙합니다만 '고상한 변태'는 처음 들어보네요. 뭐 나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저에게 '변태'라고 할 때는 애정이 담긴 호칭이면서 저를 잘 안다는 표현입니다. 몇십 년을 함께 하더니 이제는 '고상한 변태'라고 격상시켜 주네요.


거기서 착안한 제목이 떠올랐어요.


'고상한 변태생활자의 수기'


제 아이돌이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눈치채셨겠지요? 그의 작품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오마주한 제목입니다. 이 제목으로 삭발 후의 일상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갈등이 생겼어요. 고상한 변태로서의 변태가 아닐 경우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삭발 후, 저의 생각과 행동이 고상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생각을 다시 해봤어요. 지나간 세월 속에 있는 저의 행적들로 인해 친구들이 애정 어린 호칭으로 '변태'라고 불러주었을 때 고상하지 못한 적도 있었을 겁니다.

제목을 바꿨습니다.


'무해한 변태생활자의 수기'


마음에 듭니다. 무해하게 변태생활에 들어가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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