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뿌리가 걸어온 여정
아로마테라피에서 고요의 오일이라 불리는 베티버는, 그 별명처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복잡한 생각을 땅으로 내려놓게 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대 지방에서 자라지만 그 뿌리는 서늘하고 습한 흙의 기운을 머금고 있어, 고대부터 천연 냉각제로 활용되어 왔다. 잎이 아닌 뿌리에서 향을 추출하는 독특한 방식은 이 식물이 가진 그라운딩(Grounding)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도의 덥고 습한 기후 속에서 문명과 함께해 온 이 식물은, 무역로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며 향료의 원료이자 마음을 다스리는 약재로 자리 잡았다. 이번 글에서는 베티버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아보고, 고대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부터 중세 이슬람의 향료 문화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 남긴 흔적을 이야기 하려 한다.
베티버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대부분 이 식물의 원산지인 인도 아대륙의 언어에서 유래했다. 그 이름 속에는 식물을 채취하는 방식과 그 식물이 가진 특성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담겨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베티버라는 이름은 인도 남부의 타밀어 베티베르에서 기원한 것으로 언어학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베티(Vetti)는 호미로 파다 혹은 자르다라는 뜻을, 베르(Ver)는 뿌리를 의미한다. 즉, 파헤쳐진 뿌리라는 뜻이다. 베티버는 잎이 아닌 땅속 깊이 뻗은 뿌리에 향기 성분이 응축되어 있어, 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을 파내어 뿌리를 캐내야만 했다. 이 단어는 이후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로 유입되면서 오늘날의 학명인 Vetiveria zizanioides의 바탕이 되었다.
고대 인도의 문헌인 베다(Vedas)나 아유르베다 경전에서는 베티버를 우시라 또는 우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 아유르베다 자료에 따르면 이 단어는 향기로운 뿌리 혹은 열을 식히는 뿌리로서의 용례를 가지며, 실제로 체내의 과도한 열(Pitta)을 내리고 갈증을 해소하는 약재로 쓰였다. 비록 단어 자체가 열을 식히는 식물이라는 뜻을 언어학적으로 내포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고대 문헌상에서 베티버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식물로 일관되게 묘사된 것은 사실이다.
인도 북부와 페르시아어권에서는 베티버를 쿠스 또는 카스라고 부른다. 일부에서는 이 단어가 페르시아어로 달콤한, 즐거운 등을 의미하는 단어와 어원적으로 연결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베티버의 향기가 주는 달콤함과 안정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은 문화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인도에서는 베티버로 만든 시럽이나 음료를 쿠스 샤벳(Khus Sherbet)이라 부르며 여름철 별미로 즐기는 관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티버의 고향인 인도에서 이 식물은 고대부터 생활의 필수품이자 약재로 통했다. 특히 인도의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지혜로운 도구로 활용되었다.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는 여름철 혹서를 피하기 위해 베티버 뿌리를 엮어 만든 커튼이나 매트인 쿠스 타티스(Khus Tattis)를 창문과 문에 걸어두는 전통이 있다. 이 커튼에 물을 뿌리면, 바람이 불 때마다 수분이 증발하면서 실내 온도를 낮추는 기화 냉각 효과가 발생한다. 동시에 젖은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윽한 흙냄새가 방 안을 채우며 쾌적함을 선사한다. 이러한 방식이 고대 왕족이나 상류층의 주거 공간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민속 자료에서 자주 언급되며, 전기가 없던 시절 고온 다습한 기후를 극복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의 전통 의학 아유르베다 문헌에서 베티버는 피타(Pitta) 도샤를 진정시키는 약재로 설명된다. 피타는 불과 물의 원소로 체내의 열과 대사를 관장하는데, 이것이 과도해지면 염증이나 발열 증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고대 의사들은 베티버를 사용하여 열사병, 고열, 두통, 그리고 염증성 피부 질환을 다스리고자 했다. 베티버를 우려낸 물을 마시거나 페이스트 형태로 피부에 바르는 전통적인 사용법은 문헌과 전승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베티버는 힌두교 의식에서도 사용되는 식물 중 하나이다. 신성한 조각상을 씻기는 의식에 베티버를 포함한 향기로운 허브 물을 사용하는 관습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베티버 뿌리로 만든 화환을 신상에 걸어두거나 예물로 바치기도 하는데, 이는 베티버의 향기가 영적인 기운을 맑게 하고 수행을 돕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동방의 신비로운 향기
인도에서 시작된 베티버는 고대 무역로를 타고 서쪽으로 퍼져나갔으며,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상인들에게도 알려졌다.
고대 로마는 인도양과 홍해를 잇는 무역로를 통해 후추, 시나몬 등 다양한 향신료를 수입했다. 베티버 뿌리 또한 이 경로를 통해 로마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로마 문헌에 등장하는 나드가 베티버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스파이크나드(Spikenard)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이견이 있다. 따라서 베티버가 로마에서 특정 이름으로 체계적으로 유통되었다기보다는, 동방에서 온 이국적이고 향기로운 뿌리의 하나로 소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향수 산업에서 베티버 오일은 휘발성이 강한 향을 잡아주는 고정제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대인들이 화학적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고정제로 명명하여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통 향유나 아타르 제조 과정에서 베티버를 베이스로 사용할 때 향이 오래 지속된다는 경험적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베티버가 단독 향료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향의 조화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페르시아 상인들은 인도와 지중해를 잇는 중계 무역을 통해 베티버를 중동 지역에 소개했다. 사막 기후인 중동에서 베티버의 냉각 효과와 깊은 흙내음은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베티버를 귀하게 여겼으며, 왕실 정원이나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더위를 식히거나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 베티버 뿌리를 활용했다는 전승이 있다.
중세 시대,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증류 기술의 발전과 함께 향료 문화가 꽃피웠으며, 베티버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슬람의 연금술사들은 고대의 증류법을 발전시켜 식물의 정유를 추출하는 기술을 체계화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중동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구리 증류기를 사용하여 베티버 뿌리를 장시간 저온 증류하는 방식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렇게 추출된 짙은 녹색의 오일을 루 쿠스라 부르며, 이는 뿌리 자체보다 훨씬 농축되고 복합적인 향을 지닌다. 이러한 전통적인 증류 방식은 중세 이슬람 문명의 향료 제조 기술이 베티버 오일의 품질 향상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중세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발달한 전통 향수 아타르 제조에 있어, 샌달우드 오일과 함께 베티버 오일은 중요한 베이스이자 흡수 매체로 사용되었다. 특히 여름용 아타르인 샴마마나 마즈무아 같은 복합 향료를 만들 때 베티버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는 베티버의 서늘한 성질이 더위를 잊게 해 준다는 믿음과 향의 지속성을 높여주는 특성 때문이었다. 모든 아타르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베티버는 고급 아타르 제조에 있어 선호되는 재료 중 하나였다.
인도 대륙의 흙 속에서 자라난 베티버는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실용적인 냉각제이자 치유의 약재로 기능해 왔다. 타밀어 파헤쳐진 뿌리라는 이름처럼, 이 식물의 진가는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고대 인도인들에게는 더위를 식히는 지혜로운 도구였고, 로마와 중동으로 전해지며 이국적인 향료로 소비되었으며,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증류 기술을 통해 고품질의 오일로 거듭났다. 무엇보다 흔들리는 땅을 붙잡는 그 강인한 뿌리의 생태적 특성은, 인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주는 안정과 보호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다. 오늘날 우리가 베티버 오일에서 느끼는 깊은 평온함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인류의 오랜 믿음이 향기 속에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일 것이다.